항목 ID | GC0940077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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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盧武鉉 |
영어공식명칭 | Roh Moohyun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경상남도 김해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박종순 |
출생 시기/일시 | 1946년 9월 1일 - 노무현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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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 시기/일시 | 1959년 - 노무현 진영대창국민학교 졸업 |
수학 시기/일시 | 1966년 - 노무현 부산상업고등학교 졸업 |
활동 시기/일시 | 1975년 - 노무현 제17회 사법고시 합격 |
활동 시기/일시 | 1981년 - 노무현 부림사건 변론 |
활동 시기/일시 | 1982년 - 노무현 부산미국문화원방화사건 공동 변호인단 참여 |
활동 시기/일시 | 1987년 - 노무현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부산본부 상임집행위원장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988년 - 노무현 제13대 국회의원 당선 |
활동 시기/일시 | 2002년 - 노무현 제16대 대한민국 대통령 당선 |
활동 시기/일시 | 2004년 - 노무현 영국 바스대십자훈장 수여 |
활동 시기/일시 | 2008년 - 노무현 무궁화대훈장 수여 |
활동 시기/일시 | 2008년 - 노무현 봉하마을 귀향 |
몰년 시기/일시 | 2009년 5월 23일 - 노무현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2009년 - 사람사는세상노무현재단 설립 |
출생지 | 노무현대통령생가 - 경상남도 김해시 진영읍 봉하로 129[본산리 30] |
거주|이주지 | 노무현대통령의집 - 경상남도 김해시 진영읍 봉하로 135[본산리 30-6] |
학교|수학지 | 진영대창국민학교 - 경상남도 김해시 진영읍 진영로 236[여래리 384-9] |
학교|수학지 | 진영중학교 - 경상남도 김해시 진영읍 장등로 29[진영리 1611-6] |
학교|수학지 | 부산상업고등학교 -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당감서로 137[당감동 642] |
묘소 | 노무현대통령묘역 - 경상남도 김해시 진영읍 본산리 19-4 |
성격 | 법조인|정치인 |
성별 | 남 |
본관 | 광주 |
대표 경력 | 대한민국 대통령 |
[정의]
경상남도 김해 출신의 법조인이자 정치인.
[가계]
노무현(盧武鉉)[1946~2009]은 1946년 9월 1일 지금의 경상남도 김해시 진영읍 본산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광주이다. 아버지는 노판석, 어머니는 이순례이며, 3남 2녀 중 막내이다. 늦둥이를 낳은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첫째 형 노영현이 가장 노릇을 하며 노무현을 뒷바라지하였다. 1973년에 권양숙과 결혼하여 1남 1녀를 두었다.
[활동 사항]
노무현은 1959년 진영대창국민학교[현 진영대창초등학교]를 졸업하였다. 국민학교 담임에 의하면, 키가 작지만 부지런하고 자기주장이 뚜렷하며 공부 잘하던 시골 소년이었다고 한다. 진영중학교를 졸업하고, 1963년 부산상업고등학교[현 개성고등학교]에 장학생으로 들어갔다. 부산상업고등학교 졸업 후 노동자로 일하였고, 고향 봉하마을 들판 뱀산 자락에 ‘마옥당(磨玉堂)’이란 토담집을 짓고 고시 공부를 하였다. 고졸 출신으로 치러야 하는 사법및행정요원예비시험에 합격한 후 군에 입대하였다. 전역 후 다시 공부를 시작하여 1975년 네 번째 도전 만에 제17회 사법고시에 합격하였다.
1977년 대전지방법원 판사로 임용되었으나 7개월 만에 사퇴하고, 부산에 변호사 사무실을 열어 조세 전문 변호사로 일하였다. 1981년 전두환 정권의 반정부 인사 고문 사건인 부림사건의 변론을 맡게 되면서 인권 변호사로 활동하였고, 부산YMCA 시민중계실에서 무료 법률 상담을 시작하였다. 1982년에는 부산미국문화원방화사건 공동 변호인단으로 참여하였다. 이후 문재인 변호사와 노무현문재인합동법률사무소[현 법무법인 부산]를 열었다. 1984년 부산공해문제연구소 이사를 맡아 낙동강 하구언 반대 운동을 벌였다. 1985년에는 변호사 사무실에 노동법률사무소를 열었으며, 동시에 부산민주시민협의회 상임위원장으로 활동하며 재야 지도자로 성장하였다. 이 무렵 노무현은 노동자 권익 보호에 앞장서며 노동 운동의 발전에 함께하였다.
1987년 2월 고 박종철 부산추도회에서 추도사를 하고, 5월에 발족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 부산본부 상임집행위원장을 맡았다. 이때 사법권 침해와 인권 유린에 항의하는 활동으로 ‘인권변호사 노무현’이라는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6월 민주화운동과 관련하여 1987년 연행, 감금, 구속되는 과정에서 변호사 업무 정지 처분을 받았다. 부산 지역 인권 변호사들과 함께 노동문제연구소를 설립하였다.
이후 1988년 제13대 총선에 당선되면서 부산 동구 국회의원으로 정치를 시작하였다. 제5공화국비리조사특별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며 ‘청문회 스타’라는 이름을 얻어 주목받았다. 그러나 제14대 총선, 1995년 부산광역시장선거, 제15대 총선에서 연이어 낙선하였다. 1997년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하여 부총재를 역임하였다. 제16대 총선에서도 다시 지역주의 극복을 선언하며 부산광역시 북·강서을에 출마하여 낙선하자, 사람들이 ‘바보 노무현’이라는 별명을 붙였다. 그때 정치인 팬클럽인 노사모[노무현을 사랑하는 모임]가 생겼다. 국회의원 낙선 후 2000년 8월부터 2001년 3월까지 해양수산부장관을 지냈다.
2002년 이른바 ‘노풍’을 일으키며 제16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참여정부’를 표방하며 취임한 지 1년 만에 선거 중립 의무 위반과 측근 비리 등에 대한 야당의 사과 요구를 거절하여 탄핵소추안이 국회에 제출되고 가결되었다.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촛불 시위에 이어 제17대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이 과반 의석을 차지하였고, 헌법재판소에서는 탄핵소추안 기각 결정이 내려지면서 대통령직에 복귀하였다.
노무현은 대통령으로 재임하며, 주권자로서 시민의 힘과 실질적인 민주주의 실현의 열망을 담아 국정 전반을 개혁하려 애썼다. 권력 기관을 중립화하고, 부패 정치·관치 경제·권언 유착 근절로 사회 투명성을 높였으며, 내실 있는 경제 성장으로 1인당 국민 소득 2만 달러를 달성하였다. 또한 복지 예산을 확대하고, 국가 균형 발전, 지방 자치와 분권, 정부 혁신을 본격화하였다. 그리고 2007년 제2차 남북정상회담에서 ‘남북 관계 발전과 평화 번영을 위한 선언’을 이끌어 내었다.
2008년 2월 25일 퇴임 후 고향인 봉하마을로 귀향하여 친환경 생태 농업을 하며 지역민과 함께하였다. 사저는 경상남도 김해시 진영읍 봉하로 135에 있다. ‘박연차 게이트’ 등 친인척 비리로 검찰 수사를 받다가 2009년 5월 23일 봉화산 부엉이바위에서 투신하여 사망하였다. 2009년 5월 29일 국민장으로 영결식이 거행되었다.
[저술 및 작품]
노무현의 저서로 『사람 사는 세상』[현장문학사, 1989], 『노무현이 만난 링컨』[학고재, 2001], 『여보, 나 좀 도와줘』[새터, 2002], 『노무현의 리더십 이야기』[행복한책읽기, 2002], 『진보의 미래』[동녘, 2008], 『부치지 못한 편지』[퍼플레인, 2009] 등이 있다.
[묘소]
노무현의 무덤은 경상남도 김해시 진영읍 본산리 19-4에 있다. 비문은 별도로 쓰지 않고 어록 중에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입니다.”라는 한 문장을 신영복의 글씨로 새겼다. 2009년 보건복지부 국가보존묘지심의위원회 심의를 거쳐 국가보존묘지 제1호로 지정되었다.
[상훈과 추모]
노무현은 2004년 영국 최고 훈장 바스대십자훈장, 폴란드 흰독수리훈장, 2006년 도미니카공화국 건국영웅대십자훈장, 2007년 스페인 민간공로최고훈장, 카타르 독립대훈장, 쿠웨이트 무바라크알카비르훈장, 사우디아라비아 국가 최고 훈장 킹압둘아지즈훈장, 2008년 대한민국 무궁화대훈장 등을 수여받았다.
2009년 사람사는 세상 노무현재단이 설립되었다. 고향 봉하마을에 추모의 집과 깨어있는 시민 문화 체험 전시관 등이 운영되고 있다. 노무현 관련 영화로 「시민 노무현」, 「노무현과 바보들」, 「노무현입니다」, 「무현, 두 도시 이야기」 등이 있으며, 2023년에 다큐 영화 「봉하 가는 길」 시사회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