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40077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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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姜成甲 |
영어공식명칭 | Kang Seonggap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경상남도 김해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박종순 |
출생 시기/일시 | 1912년 6월 21일 - 강성갑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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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 시기/일시 | 1925년 - 강성갑 의령공립보통학교 입학 |
수학 시기/일시 | 1930년 - 강성갑 마산공립상업학교 졸업 |
활동 시기/일시 | 1946년 - 강성갑 김해 진영교회 담임목사 재직 |
활동 시기/일시 | 1948년 - 강성갑 한얼중학교 설립 |
몰년 시기/일시 | 1950년 8월 2일 - 강성갑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54년 - 강성갑 추모 동상 제막 |
출생지 | 경상남도 의령군 지정면 오천리 웅곡마을 |
활동지 | 경상남도 김해시 진영읍 |
묘소 | 경상남도 김해시 진영읍 진영리 |
성격 | 교육가 |
성별 | 남 |
본관 | 진주 |
대표 경력 | 부산대학교 교수|김해 진영교회 담임 목사 |
[정의]
경상남도 김해 지역에서 활동한 교육가.
[가계]
강성갑(姜成甲)[1912~1950]은 1912년 6월 21일 지금의 경상남도 의령군 지정면 오천리 웅곡마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강봉석(姜鳳碩), 어머니는 기독교인으로 자녀 교육에 특별한 관심을 가졌던 손온천(孫溫川)이다. 3남 2녀 중 둘째 아들이다. 1933년 독립운동가 오형선의 딸 오중은과 결혼하였다.
[활동 사항]
강성갑은 1925년 의령공립보통학교[현 의령초등학교]에 입학하였다가, 마산 창신학교로 전학하여 1927년 졸업하였다. 이어 1930년 마산공립상업학교[현 마산용마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1932년부터 장유금융조합에 다니면서 기독교 농촌 운동에 참여하였다. 1946년에 김해 진영교회 담임목사가 되었고, 1947년 8월에는 겸직하고 있던 부산대학교 교수직을 그만두고 농촌 사회 개혁 운동에 나섰다. 강성갑은 농촌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하여 새로운 교육 운동에 앞장섰는데, 덴마크 그룬트비(Grundtvig)의 사상을 우리 실정에 맞게 적용한 것이었다.
강성갑은 1946년 8월 15일 진영복음중등공민학교 설립 인가를 받고, 진영대흥국민학교[현 진영대흥초등학교]의 가교사를 빌려 야간 학교를 개교하였다. 1948년 1월 26일에는 삼일학원의 한얼초급중학교 설립 인가를 받았다. 이어 1948년 9월에 지금의 경상남도 김해시 진영읍 진영리 철하마을에 학교 부지 21,488㎡를 매입하여 한얼중학교를 개교하였다. 또한 확성기를 지게에 짊어지고 진영을 비롯하여 대산[현 경상남도 창원시 의창구 대산면]·한림[현 경상남도 김해시 한림면]·진례[현 경상남도 김해시 진례면]·장유[현 경상남도 김해시 장유동] 등 인근의 전통 시장을 다니며 “아는 것이 힘이다. 배워야 산다”라고 외치며, 지역민들의 참여를 이끌었다.
강성갑의 교육 실천으로 주목받는 것은 노작(勞作) 교육으로, 한얼중학교에는 성냥 공장, 기와 공장, 목공장이 있었다. 학생을 직접 가르치는 기술자들을 ‘선생님’이라 불렀으며, 월급 또한 교장과 같이 지급하였다. 일을 시키는 교육자가 아니라 함께 일을 하는 교육자였다.
1950년 8월 2일, 강성갑을 모함하던 일부 지역 유지들의 무고로 공산주의자라는 누명을 쓰고 낙동강 변 수산교 아래에서 총살당하였다. 전쟁 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의 애도와 추모 속에서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1950년 10월 재판에서 무고가 밝혀져 진영지서장 등이 처벌받았다.
[묘소]
강성갑의 유해는 생전의 유언에 따라 1954년에 한얼중학교 교정에 세워진 추모 동상 탑신 아래에 안치되었다.
[상훈과 추모]
1954년 5월 27일 한얼중학교 교정에 조각가 윤효중이 제작한 ‘강성갑 추모 동상’의 제막식이 열렸다. 경상남도 김해시에서는 강성갑선생기념사업회 주최로 겨레의상록수강성갑선생기념음악회를 비롯하여 백일장·학술 세미나·토론회 등 다양한 활동이 열리고 있다. 2023년 현재 강성갑기념관 건립 논의도 진행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