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4008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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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漁業 |
영어공식명칭 | Fishery Industry |
분야 | 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남도 김해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하지영 |
[정의]
경상남도 김해의 지역민이 물고기·조개·김·미역 등을 잡거나 기르는 산업.
[개설]
김해(金海)의 한자에는 ‘바다 해(海)’가 들어 있으나 지리적으로 서남쪽 지역 일부만 바다와 접하고 있어 바다에 면한 육지가 많지 않았다. 해안선의 연장은 녹산과 명지 지역을 중심으로 약 16.8㎞ 정도였으며, 이 일대는 낙동강 삼각주 지역으로 모래섬이 펼쳐져 있어 밀물로 바닷물의 수위가 높아졌을 때만 작은 배를 운행할 수 있었다. 따라서 김해의 어업은 크게 발달하지 못하였으며, 낙동강 하구를 중심으로 하천과 바다가 접한 일부 지역에서만 이루어졌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따르면, 조선 시대 김해도호부는 낙동강 하구의 바닷물과 민물이 만나는 이곳을 중심으로 숭어·전복·밴댕이·붕어 등을 어획하였으며, 미역 등을 채취하였다.
개항 이후 1883년(고종 20) 「조일통상장정(朝日通商章程)」이 체결되고, 1908년(순종 2) 「어업법」이 제정된 가운데 일본 어민의 조선 이주도 본격화되었다. 경상도 지역에 특히 많은 어민들이 정착해 곳곳에 ‘이주 어촌’이 조성되기도 하였지만 김해 지역은 크게 영향을 받지 않았다. 1908년경 김해군의 어업 종사자 수는 43호에 136명으로 인근의 동래나 창원에 비해 적었다. 어망 수 역시 16개밖에 되지 않아 동래의 871개, 창원의 211개에 비하면 수가 많지 않았다. 주로 명지도 내 진동포(鎭東浦)를 비롯해서 하신전포(下薪田浦)와 선암리(仙巖里), 가락의 죽림포(竹林浦)와 내죽포(內竹浦)에 집중되어 있었고, 특히 진동포는 김해군에서 수산업이 가장 성행한 곳이었다. 주로 어획된 수산물은 붕장어·서대·복어·전어·보구치·송어·수조기·농어·게·갯가재 등이었으며, 명지도에서는 조선 시대부터 이어 오던 제염업도 왕성하였다.
1920~1930년대를 거치면서 김해군의 어업 종사자 수는 다소 증가하였다. 조선인 199명, 일본인 9명으로 총 208명으로 확인되며, 당시 어업 종사자 수가 증가한 것은 김 양식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낙동강 하구 지역은 조류가 완만하고 수심이 얕으며 각종 동식물성 플랑크톤이 풍부해 일제 강점기 김의 주요한 생산지로 확인되며, 조선에 정착한 일본인들도 낙동강 하구의 김 양식에 큰 관심을 보였다. 이후 낙동강 하구의 김 재배가 많이 늘어나 전국적인 명성을 얻기도 하였다. 일본인들은 이를 일본으로 수출하였고, 때에 따라서는 도쿄[東京]의 대표적인 김 생산지인 ‘아사쿠사[淺草]’ 지역의 상표를 붙여 조선에 되팔기도 하였다. 낙동강 하구에서 김 양식업이 활기를 띠자 김 재배와 관련된 단체들이 설립되었으며 이는 낙동강해태어업조합, 동면다대어업조합, 김해어업조합 등이다. 1930년경 이들 조합의 김 생산액은 20~30만 엔에 달하였다.
해방 이후 김해의 어업으로 두드러진 것은 없고, 명지 앞바다의 김 양식업이 과거의 명성을 유지하는 정도였다. 1970년대 이후 명지와 가락·녹산 등 낙동강 하구 지역이 차례로 부산직할시로 편입되면서 현재 김해 지역은 바다와 접한 육지도 사라진 상태이다. 한때 담수어 양식을 하기도 하였으나 최근에는 하천의 오염과 도시화의 진전으로 이 또한 미미한 수준에 머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