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4009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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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王后寺 |
분야 | 종교/불교 |
유형 | 기관 단체/사찰 |
지역 | 경상남도 김해시 |
시대 | 고대/삼국 시대 |
집필자 | 조원영 |
건립 시기/일시 | 452년 - 왕후사 건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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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 | 사찰 |
창건자 | 질지왕 |
[정의]
가야 시대 현재 경상남도 김해 지역에 창건되었던 사찰.
[개설]
왕후사는 가락국 452년(질지왕 2)에 허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수로왕과 혼인했던 자리에 세워졌다고 문헌에 전하는 사찰인데, 아직까지 정확한 사찰의 위치는 확인되지 않았다.
[건립 경위 및 변천]
왕후사는 『삼국유사』와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김해도호부 고적(古蹟)조, 1630년(인조 8)에 편찬된 『김해읍지』 비판(碑板)조에 인용된 「명월사사적비문(明月寺事蹟碑文)」에 기록되어 있다. 452년 가락국 질지왕이 즉위 다음 해에 허황옥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수로왕과 혼인했던 자리에 세웠던 절이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에는 수로왕의 8대손인 김질왕(金銍王)이 시조모인 허황옥을 위해서 452년에 절을 세워 왕후사라 하였는데, 후에 인근에 장유사가 세워지면서 장유사의 삼강(三綱)이 왕후사가 장유사의 밭 동남쪽 지역 안에 있다고 하여 왕후사를 폐사시키고 장사(莊舍)를 만들어 가을에 곡식을 거두어 겨울에 저장하는 장소와 말을 기르고 소를 치는 마구간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한편 『삼국유사』의 ‘금관성파사석탑’조에서는 왕후사가 남쪽의 왜를 진압하는 영험을 지녔다고 전한다. 왕후사의 정확한 위치에 관해서는 문헌 간에 고증과 견해들이 엇갈리고 있다. 「가락국기」에서 왕후사가 장유사의 영역에 속했다는 기록에 근거해 현재 장유2동 대청리 불모산에 위치한 장유사 근처라고 추정하는 견해가 있다.
한편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왕후사의 옛 터가 장유산(長遊山)이라고 하였는데, 현재 김해시 장유3동 남쪽의 옥녀봉에 해당한다. 옥녀봉 인근의 응달리 태정마을 뒷산에 있던 임강사(臨江寺) 혹은 태장사(苔長寺)가 왕후사였다고도 하고, 부산광역시 강서구 지사동 명월산 북쪽에 있었던 흥국사가 왕후사 터였다고 보는 주장도 있다.
[현황(조직,시설 현황 포함)]
조선 시대 문헌에서 왕후사를 김해 장유산 아래로 표기하고 있어 김해시에서는 이를 근거로, 응달동, 대청동[장유계곡], 삼방동[은하사 부근] 일대 3곳을 왕후사 터 후보지로 압축하여 조사하고 있다.
응달동의 경우 2018년 7월 주민이 건물을 짓기 전 전문기관에 발굴 조사를 의뢰했는데, 고려 시대 기왓장과 수혈[구덩이] 유구는 확인되었지만, 왕후사 터로 볼 만한 유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응달동 주변이 왕후사 터일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고 있다.
한편 불교문화재연구소에서는 2021년 4월 대청동 산69-11 불모산 자락에서 10세기로 비정되는 통일 신라 시대 절터를 확인했다. 이곳은 불모산 용지봉 남쪽 대청계곡 일대로 하단부에서 기단 석축과 통일 신라 시대 기와가 확인되어 왕후사 또는 장유사 등 가야 불교 전승과 관련된 유물이 더 나올지 관심을 받고 있다. 절터에서는 길이 40m 정도의 석축과 기단 2기, 초석을 포함한 건물지 2동이 통일 신라 시대 유물인 선문 기와, 토기 등과 함께 확인됐다. 하지만 아직까지 왕후사 터라고 확정할 수 있는 증거는 나오지 않았다.
[관련 문화재]
왕후사와 관련된 국가유산은 확인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