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40119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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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積算 家屋 |
영어공식명칭 | Enemy's House |
이칭/별칭 | 일식 가옥 |
분야 | 생활·민속/생활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남도 김해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권순강 |
[정의]
일제 강점기 경상남도 김해 지역에 일본인들이 건립한 일식 주택.
[개설]
적산(敵産)이란 자기 나라의 영토에 적국이 점령하여 소유한 재산으로 기업과 토지를 비롯한 부동산뿐만 아니라 동산류를 일컫는다. 우리나라에서 적산 가옥(敵産 家屋)은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들이 건립한 주택으로 1945년 광복 이후 일반인들에게 불하(拂下)되었다. 1910년 8월 29일 한일 병합(韓日 倂合)으로 일본인들이 국내로 많이 유입되었고, 총독부가 설치되어 전국에 정치적·경제적으로 중요한 지역에 도시 기반 시설을 정비하였다. 또 도로의 정비와 철도의 개설로 육운 교통이 발달하여 지방의 거점 대도시나 수탈의 대상이 있는 지역에 일본인들의 유입이 더욱 확산되었다. 특히 이전에는 개항장과 어항, 철도 주변 도시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이 한일 병합으로 농업 이민과 함께 농경지가 있는 내륙으로 침투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공공 기관의 일자리와 경제력을 일본인들이 거의 장악하였고 그들의 주거지는 본국의 주거 형태 그대로 재료까지 반입하여 건립되었다.
김해는 김해평야와 진례분지 그리고 진영평야가 있어 곡식 생산에 적합하였고 개항장인 부산 인근에 위치하여 근교 농업에 유리하였다. 하지만 김해가 위치한 낙동강 변은 황무지가 많았으며 잦은 홍수 범람과 농업용수 확보의 어려움, 그리고 염해(鹽害) 등으로 인해 안정적인 농업 경영이 어려웠다. 이에 일본인들은 황무지를 싸게 구입하여 낙동강 변에 제방을 쌓은 다음 양배수 시설을 설치하여 황무지를 대규모 농경지로 전환하였다. 이후 김해 지역에는 무라이농장[村井農莊] 및 동면수리조합 제방[1912년 준공], 김해수리조합 제방[1916년 준공], 대저수리조합 제방[1917년 준공], 대산수리조합 제방[1922년 준공]이 준공되었다.
[김해의 적산 가옥]
김해 지역은 무라이농장을 시작으로 동양척식주식회사[1909년에 대한제국에서 업무 시작]가 설립되어 대규모 이민 정책 실시와 수리 조합이 설립됨에 따라 일본인들이 유입되기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김해 지역에는 행정의 중심지인 김해 도심지, 농토 근처인 수리 조합 인근, 그리고 1907년 마산선(馬山線) 개통으로 철도 교통의 중심지가 된 진영 주변으로 적산 가옥들이 많이 지어졌다. 김해 도심지 중에서는 봉황동에 적산 가옥이 많았는데 주홍 가옥, 윤상열 가옥, 장행규 가옥, 허금 가옥, 안덕대 가옥, 손옥선 가옥 등이 2004년까지 남아 있었다. 2024년 현재는 허금 가옥과 안덕대 가옥만이 남아 있다. 과거 김해 지역이었던 부산광역시 강서구 대저동에는 양덕운 가옥, 삼호재단 가옥, 낙동강칠백리 음식점[부산광역시 근대건조물], 박흥목 가옥, 이동철 가옥, 이기문 가옥이 남아 있다. 김해시 진영읍 진영리에는 박학술 가옥, 김병두 가옥, 매일식육점 등이 있었고 김해시 무계동에는 장유초등학교의 사택이 있었다.
한편, 진영역이 개통되면서 진영역을 비롯한 창고와 관사들도 함께 건립되었다. 이 뿐만 아니라 진영역 주변에는 도시와 시장이 형성되고 도로도 개통되어 상가와 일본인 주택이 많이 건립되었다. 또한 여관도 건립되어 번화한 근대기 신도시의 모습이 갖추어졌다. 현재 적산 가옥들이 노후화와 경제성을 이유로 급속히 사라지고 있는 가운데 진영역은 진영역철도박물관으로 용도를 변경하여 활용, 보존되고 있다. 무라이농장이 있었던 곳에는 적산 가옥이 여러 채 남아 있지만 현재는 창원시로 행정 구역이 변경되었다.
[평가와 의의]
적산 가옥은 일제 강점기 수탈의 한 상징이면서 동시에 근대기 우리 주거 문화에 외래 주거 문화를 강제적으로 이식한 형태를 잘 보여 주는 유구이다. 적산 가옥은 2층의 구조로, 부속 건물들의 일체화, 유리 창문을 설치하여 마루와 툇마루를 실내화(室內化) 하였다. 그리고 유리, 벽돌, 시멘트, 철재 등의 재료가 사용되어 기존의 성리학적·예제적 질서에서 벗어나 생활의 편의와 새로운 생활 양식을 포함한 매우 이질적인 주택이었다. 이러한 적산 가옥은 서양식 건축과 개화파들의 주생활 개선 운동 등의 영향으로 도시형 한옥의 발달에 일조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