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40128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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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如意-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유형 | 작품/설화 |
지역 | 경상남도 김해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한양하 |
수록|간행 시기/일시 | 1998년 - 「여의고개」 『김해의 설화』에 수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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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지명 | 여의고개 - 경상남도 김해시 봉황동 |
성격 | 전설 |
주요 등장 인물 | 황세 장군|여의 낭자|유민 공주 |
모티프 유형 | 혼인담|정절담|지명 유래 |
[정의]
경상남도 김해시 봉황동에 있는 여의고개와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채록/수집 상황]
「여의고개」는 1998년 김해문화원에서 발행한 『김해의 설화』에 수록되어 있다.
[내용]
가락국 제9대 겸지왕[肅王] 때 남대정동(南大政洞)에 사는 출정승과 북대사동(北大寺洞)에 사는 황정승은 자식이 태어나면 혼인을 시키기로 약속했다. 이후에 황정승은 아들 세(洗)를 낳고, 출정승은 딸 여의(如意)를 낳게 되었는데 출정승은 마음이 변하여 아들을 낳았다고 속였다. 자라면서 여의는 남자 옷을 입고 서당에 다녔는데 이것을 수상하게 여긴 황세는 개라암 황세바위에 올라 오줌 멀리 누기 시합을 하자고 제의했다. 그러자 여의는 바위 뒤로 돌아가 마침 그곳에 있는 삼대로 오줌을 누어서 낭패를 면했다. 그렇지만 어느 여름 거북내[龜川]에서 함께 멱을 감게 된 여의는 더 이상 여자란 사실을 숨길 수가 없게 되자 편지를 물에 띄워 보내 황세에게 사실을 고백하였다. 출정승도 황세가 장차 훌륭한 인물이 될 것으로 믿고 혼약을 맺어 주었다.
얼마 후 황세는 신라군이 침범해 오자 출정하여 큰 공을 세우고 개선하였다. 이에 왕은 황세에게 하늘장수라는 장군 칭호를 제수하고, 외동딸인 유민(流民) 공주와 혼례를 시켜 부마로 삼았다. 여의의 부모는 파혼당한 딸에게 다른 곳으로 시집가기를 권유하지만 여의 낭자는 끝내 혼자 살다가 스물넷의 꽃다운 나이로 죽고 말았다. 공주와 혼인한 황세 또한 여의 낭자를 잊지 못하여 마음의 병으로 그 해에 죽고 말았다. 그러자 성안 사람들은 두 사람의 혼령을 위로하기 위해 그들이 같이 놀던 개라암에 작은 바위를 얹고 서남쪽의 것은 ‘황세돌’, 동남쪽의 것은 ‘여의돌’이라 불렀다고 한다. 한편 유민 공주도 봉황대 서쪽의 임호산(林虎山)으로 들어가 수도에 정진했다고 전하는데 그래서 임호산을 ‘유민산’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모티프 분석]
황세와 여의는 태어나기 전에 부모들끼리 구덕혼사[아기구덕에 눕혀 키우는 어린아이 때 부모의 뜻에 따라 혼인을 시킴]를 맺은 관계이다. 구덕혼사담은 한쪽 집안이 기울면서 파탄이 나거나 한 사람의 변심으로 결혼이 성사되지 못한다. 「여의고개」는 출정승의 변심이 첫 번째 원인이 되었으나 황세의 인물됨을 알아보고 혼인을 승낙하여 방해 요소가 없어진다. 그러나 황세가 임금의 명으로 공주와 결혼하게 됨으로써 결국 여의와 혼인이 성사되지 못한다. 화소 중 여의 낭자가 남장을 하고 황세와 같이 공부를 하면서 오줌 멀리 누기 시합을 벌이는 것은 제주도 「세경본풀이」에 자청비가 남장을 하고 문도령과 수학을 하면서 여인의 정체를 숨기기 위해 오줌 멀리 누기 시합을 하는 데서도 등장한다. 이 시합의 화소는 여인이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는 데 활용되며, 여성 인물의 지혜로움을 나타낸다. 「세경본풀이」에서 시합은 두 사람이 가까운 사이가 되는 계기로 작용한다.
「여의고개」는 임금의 명으로 공주와 혼인하게 된 황세를 그리다가 마음의 병이 생겨 죽음을 맞게 된 여의 낭자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다. 여의 낭자의 정절, 여의를 그리다가 같은 해에 죽은 황세의 애절한 사랑이 황세돌, 여의돌이라는 돌로, 황세목, 여의목이라는 나무로 고갯길에 남아 있다는 전설이다. 오래전 여의 낭자를 수호신으로 모시는 동제를 지냈는데 여의목을 당산나무로 삼아 단(壇)을 만들어 ‘여의 낭자 무덤’이라고 하는 전설이 있으며, 비(碑)가 서 있는 데서 정월 초사흗날 동제를 지내왔다고 한다. 1975년에는 출여의 낭자(出如意 娘子)의 정절을 기리기 위한 여의각(如意閣)이 세워졌고 해마다 여의제(如意祭)가 열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