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401317
한자 嶺南樂府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유형 작품/문학 작품
지역 경상남도 김해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영숙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저자 생년 시기/일시 1770년 - 이학규 출생
저술|창작|발표 시기/일시 1808년연표보기 - 「영남악부」 창작
저자 몰년 시기/일시 1835년 - 이학규 사망
성격 한시|악부시
작가 이학규

[정의]

1808년 조선 후기 문인 이학규가 유배지인 경상남도 김해에서 신라에서 고려 말에 이르기까지 영남 지역의 인물·사적·풍속·전설 등을 취재하여 지은 악부시.

[개설]

‘악부(樂府)’는 한(漢)나라 무제(武帝)가 세웠던 관청의 이름으로, 민간의 가요를 수집하여 민풍(民風)을 살피고 교화의 방향을 정립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따라서 악부시는 고대 민가(民歌)에 근원을 둔 것으로, 한대 이후 각종 민가와 토속(土俗) 등을 작품 속에 구현한 가사 우선의 노랫말이다. 그러므로 형식적인 제약에서 비교적 자유롭고 제재 또한 인간의 보편적인 정서를 두루 수용할 수 있다. 영사악(詠史樂)은 조선 후기에 활발하게 창작되었는데 우리의 역사와 풍속에서 제재를 취하여 민족적인 정서를 읊었으며 역사와 현실에 대한 비판적인 의식을 담고 있다. 「영남악부(嶺南樂府)」는 그 중 하나로 유배지 김해를 중심으로 영남 지역과 관련된 역사적 인물과 사건 및 민간의 풍속과 전설 등을 소재로 하였다.

이학규(李學逵)[1770~1835]의 본관은 평창(平昌)이다. 자는 성수(醒叟, 惺叟)이며 호는 낙하생(洛下生) 또는 낙하(洛下)를 사용하였다. 「영남악부」는 다산 정약용(丁若鏞)이 지은 『탐진악부(耽津樂府)』의 영향을 받아 지었으며 이학규의 시문집인 『낙하생집(洛下生集)』에 수록되어 있다. 1801년 신유사옥(辛酉邪獄)이 일어나자 정약용은 경상도 장기로, 이학규는 전라도 능주로 유배되었다가, 그해 겨울에 정약용은 전라도 강진으로, 이학규는 경상도 김해로 이배되는데, 이러한 유배의 와중에서도 둘은 서로가 서로의 시에 화답하며, 자신의 글과 생각을 주고받았다. 두 사람의 긴밀한 관계는 해배 후에도 지속되어, 이학규는 충주로 이주한 뒤에도 남한강의 뱃길을 이용하여 정약용을 자주 방문하였다. 정약용과의 이러한 교유를 통해 이학규는 실학파의 ‘현실주의적 문학 의식’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그 결과 이학규의 작품 속에서 김해 지역의 민간 풍속과 농촌 주민들의 생활상이 ‘가감 없이’ 형상화되고, 나아가 유배지에서 체험한 관리들의 부정부패와 그로 인해 고통받는 백성들의 현실이 적실하게 묘사되었다.

[구성]

「영남악부」 첫 머리에 「영남악부서(嶺南樂府序)」가 있고, 그 아래로 「금합을 열어보다[啓金盒]」, 「기출변(旗出邊)」, 「진풍탑(鎭風墖)」, 「회소가(會蘇歌)」, 「시림계(始林鷄)」, 「경성내(京城內)」, 「치흔왕(齒痕王)」, 「영오랑(迎烏郞)」, 「물계자(勿稽子)」, 「초선대(招仙臺)」, 「장부인(麞夫人)」, 「박제상(朴堤上)」, 「묵호자(墨胡子)」, 「용저악(舂杵樂)」, 「달도가(怛忉歌)」, 「풍월주(風月主)」, 「구형왕(仇衡王)」, 「팔관회(八關會)」, 「가야금(伽倻琴)」, 「비형랑(鼻荊郞)」, 「성제대(聖帝帶)」, 「왕이여, 가지 마소서[王毋去]」, 「김화랑(金花郞)」, 「천관녀(天官女)」, 「송화방(松花房)」, 「원효대사(元曉大師)」, 「김원술(金元述)」, 「만파식적(萬波息笛)」, 「장미 여인[薔薇女]」, 「옥보고(玉寶高)」, 「죽죽사(竹竹詞)」, 「용치탕(龍齒湯)」, 「처용무(處容舞)」, 「포석정(鮑石亭)」, 「동경구(東京狗)」, 「황창랑(黃昌郞)」, 「효불효(孝不孝)」, 「유두연(流頭宴)」, 「시를 새긴 돌[題詩石]」, 「상서장(上書莊)」, 「절영마(絶影馬)」, 「홍인랑(虹蚓郞)」, 「삼분수(三分水)」, 「능화봉(陵華峯)」, 「정과정(鄭瓜亭)」, 「두 가마솥 안의 시신[兩釜屍]」, 「대혼자(大昬子)」, 「금시랑(琴侍郞)」, 「안회헌(安晦軒)」, 「황마포(黃麻布)」, 「이문학(李文學)」, 「이익재(李益齋)」, 「무신탑(無信塔)」, 「참된 정언[眞正言]」, 「문공의 목면[文公棉]」, 「소주도(燒酒徒)」, 「철문어(鐵文魚)」, 「까치 쫓는 명령[嚇鵲令]」, 「무고악(舞皷樂)」, 「옥섬섬(玉纖纖)」, 「정당매(政堂梅)」, 「정시중(鄭侍中)」, 「김농암(金籠巖)」, 「길재야(吉再爺)」, 「산유화(山有花)」, 「영동신(靈童神)」, 「월명총(月明塚)」, 「만어석(萬魚石)」 68수가 수록되어 있다. 3·4·5·6·7언구를 자유로이 사용하였으며, 『삼국사기(三國史記)』·『삼국유사(三國遺事)』·『고려사(高麗史)』 등 사서(史書)와 영남 지방의 군현지(郡縣誌) 등의 수록 내용을 참고하였다.

[내용]

「영남악부」는 자국사에 대한 역사 인식, 전환기 역사 인물에 대한 평가, 설화와 역사의 만남, 탐관오리의 폐정, 여성의 삶과 정서, 백성을 수탈한 관리의 부패한 실상, 왕과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친 충신, 기이한 사적이 있는 역사적 인물, 영남 지역의 민풍과 토속 등에 대한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다.

「팔관회」는 신라 진흥왕이 만든 8가지 계율을 소개한 것으로 고려 태조의 훈요(訓要)를 참고 고증하여 불교를 비판하였다. 「길재야」는 고려 말 충신 길재의 덕행과 그에게 감화를 받은 선산 부녀자의 정절을 서술하였다. 「안회헌」은 우리나라에 처음 유학을 도입한 안향(安珦)의 학교 건립과 유학 부흥에 대해 칭송하였다. 「용치탕」은 ‘충공’과 ‘녹진’이란 두 인물의 대화를 통해 합리적인 인재 등용에 대해 설파하였다. 「무신탑」은 신돈(辛旽)의 악행과 불교의 폐단을 비판하였다. 「철문어」는 철문어가 쇠스랑을 빨아들이는 것처럼 백성들에게 쇠붙이를 수탈한 배원룡을 풍자하며 비판하였다. 「구형왕」은 자국 백성들을 온전하게 지키기 위해 신라에 항복한 가야국왕 김구해(金仇亥)[구형왕]의 덕을 칭송하였다. 「효불효」는 일곱 아들의 효를 부각하고 과부의 부적절한 행동을 권계한 이야기다. 「양부시」는 정중부(鄭仲夫)의 난 때 의종(毅宗)을 죽인 이의민(李義旼)과 잔혹한 중의 행위를 서술하고 비판하였다.

[특징]

「영남악부」는 ‘사실의 전달’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역사서와 지리지 등 다양한 문헌을 인용하고, 충실한 고증을 통해 사실적 기록을 지향하였다. 또한 주제면에서 부패한 관리를 비판하는 현실주의적 의식을 표명하였으며, 불교에 대해 비판하며 합리주의적 의식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제재면에서는 영남 지역의 역사적 인물에 대해 포폄하고, 영남 지역의 문풍과 토속, 전설 등을 적극 활용하였다. 서술에 있어서는 충실한 문헌 고증을 통한 사실적 기록을 하고, 대화체를 활용하여 주제를 강조하였다. 새로운 역사 소재의 발굴 및 방언과 토속어, 우리나라 전고(典故)를 활용했다는 점도 중요한 특징이다.

[의의와 평가]

「영남악부」는 비판 의식을 지닌 이학규가 국토의 옛 역사와 인물들을 고증을 통해 객관적이고 사실적으로 기록하고, 생동하는 기층민의 생활상을 탁월하게 묘사하였다. 도학 추구의 문학관에서 탈피하여 역사의식과 현실 인식을 바탕으로 조선 후기 한문학의 변화를 모색하는 영사악부(詠史樂府)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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