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400592
한자 金海五廣大
이칭/별칭 김해가락오광,가락오광대
분야 생활·민속/민속,문화유산/무형 유산
유형 놀이/놀이
지역 경상남도 김해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성진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놀이 개시 시기/일시 1890년대 - 김해오광대 시작
소멸 시기/일시 1937년연표보기 - 김해오광대 중단
재현 시기/일시 1984년 - 김해오광대 재현
문화재 지정 일시 2015년 3월 5일연표보기 - 김해오광대 경상남도 무형문화재 제37호 지정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21년 11월 19일 - 김해오광대 문화재청고시 제2021-141호에 따라 문화재 지정 번호 삭제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24년 5월 17일 - 김해오광대 경상남도 무형문화재에서 경상남도 무형유산으로 변경 지정
주관 단체 김해오광대보존회 - 경상남도 김해시 분성로 225[외동 1261-4]지도보기
성격 민속놀이
노는 시기 정월 대보름
예능 보유자 이명식|정용근
문화재 지정 번호 경상남도 무형유산

[정의]

경상남도 김해 지역에서 전승되고 있는 민속 가면극 놀이.

[연원]

김해오광대(金海五廣大)는 1890년대 부산 동래 지역의 탈놀이인 동래야류를 참고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죽림마을 주민들에 의하여 음력 정월 대보름날 밤에 연행된 이후 일제가 민족 문화 말살 정책을 펼치던 1937년 무렵 중단되었다. 1970년대에 놀이꾼들이 사라지자 연기와 춤 등을 계승하는 사람이 없어 전승이 거의 끊어졌다. 김해오광대는 ‘가락오광대’라고도 했는데, 가락은 김해의 별칭이라는 점에서 김해 지역을 대표하는 탈놀이임을 의미한다. 김해오광대의 유래에 대해서는 어느 날 낙동강으로 상자가 떠내려왔고, 그 속에 있던 탈과 극본을 바탕으로 하여 탈놀이를 하게 되었다는 설화가 전한다. 1930년대 민속학자 송석하(宋錫夏)가 경상남도 일대를 돌아다니면서 김해오광대의 탈 12점을 수합했는데, 당시 수합했던 탈과 최상수가 채록했던 대본은 1984년 김해문화원에서 김해오광대를 복원하여 재현·전승하는 기초가 되었다.

[놀이 도구 및 장소]

김해오광대는 대부분 탈을 쓰고 등장하기 때문에 탈이 가장 중요한 놀이 도구이다. 탈은 나무로 만든 사례도 있으나 주로 바가지를 이용하며, 사자탈과 담비탈은 대소쿠리로 만든다. 이외에도 중과장에 등장하는 승려의 신분을 상징하는 육환장[승려의 지팡이], 노름꾼과장에 무시르미가 천연두를 앓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강남서신사명기(江南西神司命旗)’, 영노과장에서 양반의 권위를 상징하는 부채 등이 있다.

김해오광대의 유래에서 알 수 있듯이 상자가 흘러와 머문 곳은 장터에서 가까운 선창가였으며, 이 선창가가 김해오광대의 놀이 장소가 되었다. 한편 놀이 장소를 대변마당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놀이 방법]

놀이 과장은 총 여섯 과장으로 첫째 과장은 중과장, 둘째 과장은 노름꾼과장, 셋째 과장은 양반과장, 넷째 과장은 영노과장, 다섯째 과장은 할미·영감과장, 여섯째 과장은 사자무과장이다. 놀이 방법과 내용은 아래와 같다.

① 중과장

노장(老長)과 상좌가 등장하여 굿거리장단에 맞춰 어울려 춤을 춘다. 노장이 속가(俗家)에 내려온 이유가 중생 제도가 아니라 상좌를 유혹하는 것으로 나온다.

② 노름꾼과장

먼저 노름꾼 3인이 굿거리장단에 맞춰 춤을 추다가 투전 놀음을 벌인다. 반신불수인 어딩이가 천연두를 앓는 아들 무시르미를 업고 나와 내려놓고 춤추다가 노름판에 가서 개평을 청하지만 돈이 없다고 하자 어딩이는 판돈을 가지고 달아난다. 노름꾼이 잡아서 돈을 내놓으라고 하자 무시르미 치료비에 다 썼다고 한다. 포졸이 와서 돈을 훔친 어딩이에게 포승을 질러서 잡아간다.

③ 양반과장

종가(宗家) 양반, 모(毛)양반, 애기양반과 말뚝이가 등장한다. 양반 3인이 말뚝이를 불러 마부와 하인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라는 타박을 늘어놓지만 양반의 위세는 이미 바닥에 떨어진 터라 말뚝이는 양반의 태도에 꿈쩍도 않는다. 말뚝이의 양반 조롱 결정타는 말뚝이와 양반 부인의 통정이다. 말뚝이가 양반 부인과 통정하였다고 자랑하듯 고백하고, 이를 듣는 양반은 어쩔 줄 몰라 한다.

④ 영노과장

양반이 혼자 있는 곳에 영노가 나타나 양반에게 “대국서 양반 99명을 잡아먹고 조선에 양반 너 하나 있다고 해서 오늘 잡아먹으러 나왔다.”고 말한다. 영노는 양반을 잡아먹겠다는 위협의 문답을 여러 번 나누면서 양반에게 달려든다. 양반은 자기는 양반이 아니라며 부채로 영노를 때리려다가 부채를 떨어뜨리고, 영노는 부채를 주우려 하는 양반을 괴롭힌다. 마침내 양반은 넘어져 상처를 입은 끝에 영노와의 대결에서 승리하여 겨우 부채를 집어 들고 안도의 숨을 쉬고 춤추며 퇴장한다.

⑤ 할미·영감과장

큰이[할미, 본처]가 조선 팔도를 다니며 영감을 찾다가 놀이판에 지팡이를 짚고 들어와서 영감을 부르며 악사[마을 사람]에게 영감의 행방을 묻는다. 지나갔다는 방향으로 가면서 “영감~”이라 외치며 놀이마당을 돈다. 이때 영감도 할미를 부르며 들어와 악사에게 묻고, 결국 만나게 된 할미와 영감은 서로가 화려하던 차림이 남루해짐을 한탄한다. 영감이 제물포에서 미색의 작은이를 얻었다고 말하는데, 할미가 보고자 하여 영감은 작은이를 불러들인다. 영감은 작은이를 애무하는데 할미가 질투하자, 영감은 두고 간 두 아들의 행방을 묻는다. 할미는 “큰애는 고기잡이하다가 물에 빠져 죽고, 둘째는 나무하러 갔다가 범에게 잡혀 먹혔다.”고 답한다. 통탄한 영감은 졸도하고, 작은이는 퇴장하며, 당황한 할미는 의원을 불러들인다. 의원은 맥을 짚어보고는 화병이 나서 죽었다 하고 나간다. 봉사를 불러 독경(讀經)을 하고, 무당굿을 치르고 나서, 상두꾼이 들어와 시체를 메고 「상여소리」를 하며 나간다.

⑥ 사자무과장

담비에 이어 사자가 굿거리장단에 맞춰 춤추며 들어온다. 담비는 이리저리 뛰어다니면서 사자의 비위를 건드린다. 사자가 고개를 흔들며 힘을 과시하면 담비는 달아나기도 한다. 이렇게 저렇게 다투다가 드디어 사자가 담비를 잡아먹는다.

여섯 과장에 등장하는 인물은 모두 28명이다. 장단은 굿거리장단을 많이 사용하고, 그밖에 타령장단과 세마치장단도 사용한다. 춤은 주로 덧배기춤을 춘다.

[생활 민속적 관련 사항]

김해오광대는 정월 대보름에 연행되었으며, 정월 초사흘부터 걸립[지신밟기]을 하여 경비를 조달하였다. 한편으로 탈을 제작하고 연습을 한 후 낮에는 풍년을 기원하는 줄다리기를 하고, 보름달이 뜨면 선창가에서 태평안녕과 벽사진경(辟邪進慶)을 기원하는 김해오광대를 연행하였다. 연행 후에 달집태우기를 하고, 걸립 때 쓴 고깔을 태우는 것으로 끝이 난다.

[현황]

1984년부터 전 김해문화원장이었던 류필현의 주도로 과거 연희자들을 찾아서 김해오광대를 복원하고, 김해오광대보존회를 결성하여 연행을 이어왔다. 김해오광대는 2015년 3월 5일 경상남도 무형문화재 제37호로 지정되어 이명식(李明植), 정용근(鄭龍根)이 예능 보유자로 활동하면서 명맥을 잇고 있다.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고시 제2021-141호 「문화재 지정[등록]번호 삭제 및 문화재명 표기 방식 변경 고시」에 따라 문화재 지정번호는 삭제되었다. 김해오광대는 2024년 5월 17일 국가유산청의 「국가유산기본법」 시행에 따라 경상남도 무형문화재에서 경상남도 무형유산으로 변경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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