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400132
한자 退來里
영어공식명칭 Toerae-ri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경상남도 김해시 한림면 퇴래리지도보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송경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개설 시기/일시 1914년 4월 1일 - 경상남도 김해군 이북면 퇴래리 개설
변천 시기/일시 1987년 1월 1일 - 경상남도 김해군 이북면 퇴래리에서 경상남도 김해군 한림면 퇴래리로 개편
변천 시기/일시 1995년 5월 10일 - 경상남도 김해군 한림면 퇴래리에서 경상남도 김해시 한림면 퇴래리로 개편
성격 법정리
면적 4.56㎢
가구수 275가구
인구[남/여] 437명[남 252명/여 185명]

[정의]

경상남도 김해시 한림면에 속하는 법정리.

[개설]

퇴래리한림면의 중앙에 자리한 지역으로, 조선 시대 생원과 진사를 30여 명 이상 배출할 정도로 영남에서는 유명한 마을이었다.

[명칭 유래]

퇴래(退來)는 신의와 지조로 살아간 충신들의 삶과 연관된 이름이다. 조선 전기 세종(世宗) 때 한림학사를 지낸 퇴은(退隱) 김계희(金係熙)가 연로한 부모를 봉양하기 위하여 낙향한 곳이 고향인 퇴래리였다. 또 1456년(세조 2)에는 서강(西岡) 김계금(金係錦)이 사육신 사건(死六臣 事件)으로 많은 이가 화를 당하자 벼슬을 버리고 퇴래리로 낙향하였다. 인조(仁祖)와 효종(孝宗) 때 사람으로 회령부사를 지내고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서 공을 세운 김영준도 관직을 마치고 낙향한 곳이 이곳으로, 살면서 퇴래촌(退來村)이라고 불러서 퇴래가 되었다고 한다. 나라에서 불렀으나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거나 관직에서 물러난 이들이 은거한 곳이라는 의미를 부여한 지명이라고 할 수 있다.

[형성 및 변천]

퇴래리는 1789년(정조 13) 편찬한 『호구총수(戶口總數)』에 김해도호부(金海都護府)의 하북면(下北面) 8개 리 중 한 곳으로 처음 등장한다. 하북면이 속한 김해 지역은 1895년(고종 32) 23부제가 시행되면서 진주부 김해군이 되었고, 1896년 13도제가 시행되면서 경상남도 김해군으로 개편되었다. 당시 하북면에서 상북면(上北面)이 분리되었는데, 퇴래리신천리, 용덕리, 명동리, 안하리, 안곡리, 병동리와 함께 하북면 지역이 되었다. 1914년 4월 1일 행정 구역 개편 때 상북면의 4개 리와 하북면의 7개 리를 병합하여 김해군의 14개 법정면 중 하나인 이북면으로 하고, 퇴래리에 신촌(新村), 삼미, 금곡, 소업, 신기를 합하여 이북면의 법정리인 퇴래리로 하였다. 이북면은 1981년 7월 1일 김해군과 김해시가 분리될 때 김해군의 관할로 남았다. 1987년 1월 1일 이북면이 한림면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1995년 5월 10일 김해군과 김해시가 통합하여 김해시 한림면 퇴래리가 되었다.

[자연환경]

퇴래리는 서쪽은 화포천을 사이에 두고 김해시 진영읍 설창리와 마주 보고 있고, 동쪽은 퇴래천을 경계로 한림면 명동리와 접한다. 퇴래천은 명동리 금음산 북쪽 산록에서 발원하여 명동소류지를 이루고 북쪽으로 흐르다가 퇴래리에서 화포천에 유입한다. 대부분의 지형이 평탄하며, 남쪽 퇴래미산의 북쪽 산록 말단부에 취락이 형성되어 있다. 마을 앞으로 너른 경지가 발달해 있으며 이는 화포천습지생태공원과 이어진다. 서쪽의 화포천으로는 진영읍 쪽에서 설창천과 용성천 물이 유입되고, 산록에는 퇴래못과 낙산소류지가 있다.

[현황]

2023년 12월 31일 기준 퇴래리의 면적은 4.56㎢이며, 275가구, 437명[남자 252명, 여자 185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자연 마을로 퇴은, 삼미(三美), 금곡(金谷), 새마을, 신기(新基), 아랫소업[-所業], 윗소업이 있다. 퇴래리에는 화포천습지생태공원화포천습지생태박물관, 김해한림박물관이 있으며, 남쪽에서 부산외곽순환고속도로가 동서로 지나간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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