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관국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400294
한자 金官國
이칭/별칭 가락국,금관가야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남도 김해시
시대 고대/삼국 시대/가야
집필자 이영식

[정의]

경상남도 김해 지역에서 번성했던 고대 가야 왕국.

[개설]

금관국은 기원을 전후한 시기부터 서기 532년까지 낙동강 동안의 경상남도 김해 지역에서 번성했던 고대 가야 왕국이다. 가야 문화의 발상지로서 기원전후부터 4세기 경까지 전기 가야의 가야제국 중에서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던 정치체였다. 한반도 서북 지역의 한군현과 일본 열도의 왜국들을 연결하는 동아시아 교류의 중심지로서 번성하였으며, 수로왕부터 구형왕까지 10대의 왕력이 기록되었고, 532년에 신라에 병합되었다.

[명칭]

금관국은 경상남도 김해 지역 가야국의 이칭이다. 금관가야라고도 불렸으며, 가야국이 멸망한 후에 신라인이 행정 구역명으로 붙였던 금관군(金官郡)에서 비롯된 명칭으로 생각되고 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탈해이사금 조와 파사이사금 23년 8월 조에 ‘금관국(金官國) 해변’과 ‘금관국(金官國) 수로왕’으로 표기되었으나, 법흥왕 19년 조에 “금관국주(金官國主) 김구해(金仇亥)가 왕비와 세 아들과 함께 투항하였다”고 기록되었다. ‘왕(王)’이 아니라, ‘주(主)’와 같이, 격을 낮춘 명칭 사용으로 보아, 가락국 멸망 시기 또는 멸망 이후에 붙여진 명칭으로 생각되고 있다. 『삼국사기』 열전 김유신 조에 인용된 「김유신비문」에서도 “가락(駕洛)이 처음에는 가야(加耶)라 했다가, 금관국(金官國)으로 고쳤다’고 기록한 것에서도 확인된다. 금관은 쇠 금(金), 관리할 관(官)으로 신라가 김해의 가락국을 병합하고, 김해 지역의 철산을 관리한다는 의미에서 행정구역의 명칭으로 붙였다고 생각된다. 다만 신라가 새로 통합한 행정구역 명칭 부여에 부산 동래의 거칠산국이 거칠산군으로 편제되었던 것 같이, 본래의 국명을 계승하여 군명으로 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기 때문에, 금관국의 명칭도 멸망 이전의 국명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한편 현재 김해와 관련된 역사·문화에 관한 기술에서 ‘금관(金官)’이 아니라 ‘금관(金冠)’으로 오해하여 ‘금관가야’의 이름이 선호되는 경우들도 다수 있다.

[연혁]

42년 3월, 금관국 수로왕 즉위하여 가락국[금관국] 건국.[『삼국유사』]

43년 금관국 수로왕, 신답평(新畓平)에 도읍을 정함.[『삼국유사』]

44년 금관국, 궁궐과 관사를 낙성함. 수로왕, 신궁으로 옮겨 정무를 봄. 탈해(脫解)가 나타나 왕위를 쟁탈하려 하자 수로가 싸워 계림(鷄林)으로 쫓아냄.[『삼국유사』]

48년 아유타국(阿鍮陀國) 공주 허황옥(許黃玉)금관국에 오자 수로왕이 그녀와 혼인함.[『삼국유사』] 금관국, 9간(干)의 명칭을 고침.[『삼국유사』]

77년 가야, 신라의 아찬(阿湌) 길문(吉門)의 공격을 받아 황산진(黃山津) 어구에서 싸웠으나 1천여 명이 사로 잡힘.[『삼국사기』]

87년 7월, 신라 파사왕(婆娑王)이 백제와 가야의 침공에 대비하여 가소(加召), 마두(馬頭)의 두 성을 쌓음.[『삼국사기』]

94년 2월, 가야, 신라의 마두성을 에워쌌으나 아찬 길원(吉元)의 공격을 받아 물러남.[『삼국사기』]

96년 9월, 가야, 신라의 남쪽 변경을 공격하여 가성주(加城主), 장세(長世)를 죽였으나 신라 파사왕이 보낸 5천 병력과 싸워 패배함.[『삼국사기』]

97년 정월, 가야, 신라 파사왕이 군사를 일으켜 치려 하자, 사신을 보내어 사죄함.[『삼국사기』]

102년 8월, 금관국 수로왕, 음즙벌국(音汁伐國)과 실직곡국(悉直谷國)이 영역 싸움을 하자 신라의 요청을 받아 해결에 참여하여 문제된 땅을 음즙벌국의 것으로 판정함. 이때 신라 파사왕이 수로왕을 대접. 5부에서는 이찬(伊湌)을 파견하였으나 오직 한기부(漢祇部)만 직위가 낮은 자를 보내자 화가 난 수로왕이 한기부주(漢祇部主) 보제(保齊)를 죽이고 귀국함.[『삼국사기』]

106년 8월, 신라 파사왕이 마두성주에게 명하여 가야를 정벌하게 함.[『삼국사기』]

115년 2월, 가야, 신라의 남쪽 변경을 공격함.[『삼국사기』] 7월, 가야, 신라 지마왕(祗摩王)이 친히 병력을 거느리고 황산하(黃山河)를 건너 공격해 오자 그를 물리침.[『삼국사기』]

116년 8월, 가야, 정병 1만으로 구성된 신라의 공격을 받자 성을 굳게 지킴. 때마침 비가 오래도록 내려 신라병이 물러남.[『삼국사기』]

189년 3월, 금관국 허황후, 157세로 사망.[『삼국사기』]

199년 3월, 금관국 수로왕, 158세로 사망하고 세조(世祖) 거등왕(居登王)이 즉위.[『삼국사기』]

201년 2월, 가야, 신라에 화친을 요청함.[『삼국사기』]

209년 7월, 포상팔국(浦上八國)이 공모하여 가라(加羅)를 침범하자 가라는 왕자를 신라에 보내어 구원을 요청함. 신라 나해왕(奈解王)이 태자(太子) 우로(于老)와 이벌찬(伊伐湌) 이음(利音)을 보내어 가라를 구원하여 8국을 항복시킴.[『삼국사기』] *『삼국유사』에는 212년 포상8국이 아라(阿羅)를 공격한 것으로 되어 있다.

212년 골포(骨浦), 칠포(漆浦), 고사포(古史浦) 등 3국인이 신라의 갈화성(竭火城)을 침공하였으나 패퇴함.[『삼국사기』] *『삼국유사』에는 215년의 일로 되어 있다. 3월, 가야, 신라에 왕자를 보내어 볼모로 삼게 함.[『삼국사기』]

253년 금관국 거등왕이 사망하고, 마품왕(麻品王) 즉위.[『삼국유사』]

291년 금관국 마품왕이 사망하고, 거질미왕(居叱彌王) 즉위.[『삼국유사』]

346년 금관국 거질미왕이 사망하고, 이시품왕(伊尸品王) 즉위.[『삼국유사』]

400년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이 보낸 병력이 임나가라(任那加羅)의 종발성(從拔城)에 이르자 성이 항복하였음. 안라인(安羅人)으로 구성된 수병(戍兵)은 동조함.[「광개토대왕릉비」]

407년 금관국 이시품왕이 사망하고, 좌지왕(坐知王)이 즉위.[『삼국유사』]

421년 금관국 좌지왕이 사망하고, 취희왕(吹希王)이 즉위.[『삼국유사』]

451년 금관국 취희왕이 사망하고, 질지왕(銍知王)이 즉위.[『삼국유사』]

452년 금관국, 허황후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왕후사(王后寺)를 세움.[『삼국유사』]

479년 가락국왕 하지(荷知)가 남제(南齊)에 사신을 파견하였고, 하지는 남제로부터 보국장군본국왕(輔國將軍本國王)에 제수됨.[『남제서』]

481년 3월, 가야, 고구려와 말갈이 신라의 미질부성(彌秩夫城) 등을 침공하자 백제와 연합하여 신라를 구원함.[『삼국사기』]

492년 금관국 질지왕이 사망하고 겸지왕(鉗知王)이 즉위.[『삼국유사』]

496년 2월, 가야, 꼬리가 다섯자 되는 백치(白雉)를 신라에 보냄.[『삼국사기』]

521년 금관국 겸지왕이 사망하고, 구형왕(仇衡王)이 즉위.[『삼국유사』]

524년 9월 가야국왕, 신라 법흥왕이 남쪽 국경으로 순행하여 땅을 넓혀 오자 가서 만남.[『삼국사기』]

532년 금관국왕 김구해(金仇亥), 왕비와 노종(奴宗), 무덕(武德), 무력(武力) 등 세 왕자를 데리고 신라에 항복함으로써 멸망. 신라는 그들을 진골로 편입시키고 본국을 식읍(食邑)으로 삼게 함.[『삼국사기』, 『삼국유사』] *『일본서기』에는 구체적인 연월일이 명시되지 않은 채 남가라의 멸망 기사가 여러 곳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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