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시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400312
한자 場市
이칭/별칭 5일장,전통 시장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남도 김해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하지영

[정의]

조선 후기부터 일제 강점기에 걸쳐 경상남도 김해 지역에서 정기적으로 열렸던 시장.

[개설]

조선 후기 상품 화폐 경제가 활성화되면서 전국적으로 장시가 크게 발달하였다. 당시 장시는 산간 지역까지 확대되었는데, 전국에 약 1,000여 개의 장시가 열렸다고 한다. 처음에는 고립·분산적으로 열렸던 장시가 18세기 무렵에는 인근 4~5개의 장시가 장날을 바꾸어가며 연차적으로 열리는 ‘5일장’ 체제가 되었다. 장날을 달리하는 장시가 매일같이 열리자 지역 내 상품 거래는 5일 동안 상시적으로 가능하게 되었다. 상인들은 장시를 돌아다니며 물건을 팔았고, 인접 지역의 농민들도 장터로 나와 자신들이 생산한 농산물 등을 교환하였다. 이러한 양상은 김해 지역도 마찬가지였다.

[조선 시대 김해 지역 장시]

19세기 전반기 김해에서는 5개의 장시가 개설되어 있었다. 김해 읍내의 부내장[2·7], 유하면(柳下面)[현 무계동]의 신문장[3·8], 중북면(中北面)[현 진영읍 설창리]의 설창장[4·9], 율리면(栗里面)[현 진영읍 진영리]의 관장과 태야면(台也面)[현 명지면 중리]의 반송장[5·10]이 5일장 체제로 돌아가면서 열렸다. 이 가운데 읍내의 부내장은 김해 지역의 중심이 되었던 시장으로, 인근 각 지역에서 모여드는 장꾼과 거래량이 가장 많았다. 김해 지역 내에 물자를 공급하고 김해에서 생산된 생산물을 수집하는 역할을 하였던 장시로, 미곡을 비롯해서 면포, 마포, 각종 어물과 해조류, 해삼, 소 등 다양한 물품이 거래되었다.

[개항기 김해 지역 장시]

개항 이후 낙동강 하류의 김해 지역으로 이주하는 일본인이 급증하는 가운데 철도나 도로와 같은 근대적 교통망이 발달하고 관공서나 공공 시설의 신설·이전 등으로 지역 내 중심지가 이동하는 등의 변화를 보이자 전통 사회에 기반한 장시 체제도 조금씩 변화하였다. 김해 지역의 경우 특히 경부선 철도가 부설되면서 큰 영향을 받았다. 한성과 부산을 잇는 경부선 철도는 부산역을 출발해 구포를 지나 삼랑진과 연결되면서 김해군을 동쪽으로 감싸는 형태로 부설되었는데, 이에 김해 인근의 물자는 철도역이 있는 구포와 삼랑진으로 모여들었다. 같은 시기 삼랑진과 마산을 잇는 마산선 철도가 김해 진영을 통과하는 노선으로 개통되었다. 그 결과 철도역에서 먼 김해 읍내의 부내장은 정체되었던 반면 진영은 김해군의 새로운 물류 중심지로 부상하였다. 1930년대 진영장은 읍내 부내장에 필적할 정도의 큰 장시로 성장하였다.

[일제 강점기 김해 지역 장시]

1910년 강제 병합 이후 조선 총독부는 「시장규칙」을 반포하여 한국인이 이용하는 장시를 통제하고자 하였으나, 교통이 활발해지고 상품 경제가 발달하면서 장시의 수는 더욱 늘어났다. 1910년경 김해 지역은 읍내의 부내장이 여전히 중심적인 시장이었다. 읍내장은 김해군 일대에서 생산되는 물품을 수집하여 부산과 초량, 동래, 구포 등 부산부와 동래군 일대로 공급하였다. 장에 나오는 상인의 수는 100~300명, 물품을 구입하기 위해 모이는 사람은 대략 1,500명 가량이었는데, 많을 때는 4,500명에 달하기도 하였다. 1920년을 전후해서는 김해읍 남동쪽으로 녹산장과 대저장이 신설된 반면 하계면의 설창장은 진영장에 통합되며 폐지되었다. 1930년대에는 대저면(大渚面)의 덕두장, 이북면(二北面)의 한림정장이 신설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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