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상팔국전쟁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400318
한자 浦上八國戰爭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남도 김해시
시대 고대/삼국 시대/가야
집필자 김양훈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209년연표보기 - 포상팔국전쟁 발발

[정의]

3세기 전반 고자국, 골포국 등 포상팔국이 김해 가락국을 침공한 사건.

[개설]

포상팔국전쟁 기사는 『삼국사기』의 「신라본기」와 「열전」, 그리고 『삼국유사』의 「피은」편에 각각 실려 있지만, 전쟁대상국이 각각 다르게 기술되어 있다. 이 때문에 『삼국사기』 초기 기사의 신빙성 문제와 결부되어 포상팔국전쟁의 시기와 대상국을 둘러싼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다. 포상팔국전쟁 기사에 대한 전거 자료를 추정하여 살펴본 바, 『삼국사기』「열전」과 『삼국유사』「피은」편의 기록은 6세기 후반 이후 윤색된 기록이 조작되어 실린 것이므로, 『삼국사기』「신라본기」에 기록된 포상팔국의 가락국 침입 기사가 사실에 가장 가깝다.

한편 포상팔국전쟁 발발 배경은 전쟁 시기를 언제로 설정하느냐에 따라 당시 가야의 정황과 관련하여 다양한 추론이 제시되었다. 하지만, 전쟁이 3세기 초에 발발하였고, 2세기 후반~3세기 전반 남해안 일대 여러 세력의 동향을 고려하면, 가락국이 대외 교섭과 철·철기 생산을 장악하면서 포상팔국의 불만이 고조되었기 때문에 전쟁으로 이어졌다고 보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추론이라고 볼 수 있다.

[역사적 배경]

2세기 중반 이후 한반도 중남부 지역에 철기 보급이 가속화되면서 완성 철기 및 철소재품을 통해 철기 수요를 충족시켜 나가는 정치체가 늘어났다. 또한 철소재품 공급 증대로 인하여 철기 제작 기술 확산이 이루어졌고, 철 자원 확보와 교역을 위한 조직이 구축되었다. 이후, 철·철기 생산과 유통에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는 정치체가 급성장하면서, 독점적 우위를 계속적으로 유지하기 위한 일정한 경쟁과 분쟁이 야기되었다. 이 중, 가락국은 당시 중국 대륙의 황건적의 난, 일본 열도의 왜국 대란 등 동북아시아의 정세 혼란으로 비롯된 철 부족 현상을 이용하여 철기 생산 체계를 구축하고, 그것을 기반으로 삼아 대외 교섭 이익을 독점하였고, 이에 불만을 품은 포상팔국과 분쟁 관계에 놓이게 된 것이었다.

[경과]

209년(나해이사금 14) 가을 7월, 김해의 가락국은 포상팔국에게 침입을 당하였다. 이때 신라는 석우로(昔于老)와 이벌찬(伊伐湌) 이음(利音)에게 6부(部)의 병사를 거느리고 가서 구원하도록 하였다. 신라군은 포상팔국의 장군들을 죽이고, 포로로 잡혀갔던 6000명을 빼앗아 가락국에 돌려주었다.

[결과]

포상팔국전쟁 이후 가락국이 대방-왜의 대외 교섭 중간 기착지로써 활발한 대외 교섭을 주도하였는데, 그 배경에는 주변 제국으로부터의 정치적 안전이 확보되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신라에 왕자를 인질로 파견하여 배후 안전을 확보하였고, 신라의 대 중국 군현 교섭을 지원하였다. 또한, 대중(對中), 대왜(對倭) 교섭이 이전보다 활발하게 이루어짐으로서 군현과 왜의 교섭 거점지로 발돋움하였고, 그 결과 변진 12국을 경제 연합체로 결집한 “변한왕”이 등장할 수 있었다.

[의의와 평가]

포상팔국전쟁가락국의 국가 형성 과정을 설명할 수 있는 주요한 사건으로 의의가 있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