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400326
한자 壬辰倭亂
영어공식명칭 The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2~1598, Imjin War
이칭/별칭 임진란,임진왜화,임진전쟁,문록·경장의 역,만력원정,만력조선역,임란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남도 김해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김강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592년 4월 13일연표보기 - 임진왜란 발발
종결 시기/일시 1598년 11월연표보기 - 임진왜란 종결
성격 전쟁
관련 인물/단체 도요토미 히데요시|서예원|송빈

[정의]

1592~1598년 일본이 조선을 침입해 경상남도 김해 지역을 포함한 한반도 전역에서 벌어졌던 전쟁.

[개설]

일본의 도발로 발생한 임진왜란 개전기에 김해 지역은 일본군 제3군의 침입로와 침략 거점으로 이용되었다. 강화회담기에 일본군은 죽도 왜성 등을 쌓고 지배를 하면서 김해 지역민을 수탈하였다. 정유재란기에도 김해 지역은 초기에 부산 다대포에 상륙한 일본군의 침략을 받았으며, 왜성에 일본군이 주둔하면서 많은 피해를 계속 당한 대표적인 지역이었다.

[역사적 배경]

16세기에 이르러 명의 쇠퇴, 여진족의 발흥, 일본의 통일로 조선은 남북의 일본과 여진족으로부터 차례로 침략당하였다. 특히 16세기 말 일본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오랫동안 지속되던 혼란을 수습하고 통일한 후 대륙 침략을 감행하였다. 일본은 왜변(倭變)으로 단절되었던 조선과의 교역 문제점을 외교적으로 풀지 않고 군사력으로 타개하기 위해 침략의 야욕을 드러내었다. 반면 조선은 건국 이후의 안정 속에서 국방을 소홀히 하였으므로 지방의 군사 방어 체제와 군사 동원에 많은 문제점이 드러나고 있었다. 김해 지역은 낙동강 유역에 위치하여 조선 전기에 왜구의 침략을 직접 받고 있었지만 제대로 대응을 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경과]

임진왜란 7년 전쟁은 임진왜란 개전기, 강화회담기, 정유재란기로 전개되었다. 1592년(선조 25)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이끈 제1군은 부산 앞바다에 도착하여 4월 14일에 부산진성을 함락하여 조선에 교두보를 확보하였으며, 이후 순차적으로 부산에 상륙한 일본군은 3로(路)로 나누어 북쪽으로 침략하였다. 김해에는 4월 19일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의 제3군이 서낙동강[죽도] 일원에 상륙하였으며, 4월 20일 김해읍성을 점령하였다. 일본군은 21일 창원으로 나아갔으며, 낙동강 연안을 차지하면서 북상하였다. 전쟁 초기에 조선의 관군이 쉽게 무너지자 일본군은 큰 저항을 받지 않고 한성까지 진격할 수 있었다. 그러나 6월 이후 조선 8도 전역에서 의병과 의승군(義僧軍)이 봉기하여 일본군을 타격하였는데, 김해 지역에서는 송빈(宋賓) 등 사충신(四忠臣)이 의병으로 김해읍성 전투에 참전하여 활약하였지만 모두 전사하고 말았다. 이때 김해부사 서예원(徐禮元)은 도망하였다. 이에 김해 지역은 일찍 일본군의 수중으로 넘어갔다.

한편 일본군은 명나라가 참전하자 전세의 불리함을 알고 강화 회담을 진행하면서 남쪽으로 후퇴하여 남해안에 쌓은 왜성(倭城)으로 들어갔다. 김해에는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 군이 죽도 왜성과 지성(支城)을 쌓아 주둔하였다. 이때 김해 지역에는 일본군이 계속 주둔하면서 약탈을 하였으며, 일본군 치하에서 생활하는 조선인도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일본에 포로로 잡혀갔다. 이에 국왕 선조(宣祖)는 국문으로 된 유서(諭書)를 내려 조선 백성을 회유하였다. 강화회담에서 제외된 조선은 사명당(四溟堂)을 1594년 4월부터 4차례나 서생포 왜성에 파견하여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와 회담을 하면서 일본의 사정을 파악하였다. 그러나 강화회담의 조건이 맞지 않아 회담이 결렬되었고, 1597년[정유년] 1월 일본군이 다시 쳐들어왔는데, 이를 정유재란이라고 부른다.

선봉장 가토 기요마사의 제1군은 부산 다대포에 상륙하여 양산을 거쳐 서생포에 결집하였다. 14만여 명의 일본군은 좌군과 우군으로 나누어 곡창지대 전라도를 공격하였는데, 김해 지역도 공격을 당하였다. 일본군은 충청도 직산전투에서 패배한 후 경상도로 남하하였다. 이때 나베시마 나오시게 군은 10월 김해 죽도 왜성으로 들어가 주둔하였으며, 지성인 마사 왜성과 신답 왜성에도 주둔하였다. 이후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은 사로병진책(四路竝進策)으로 총공세를 전개하였으며, 1598년 8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을 계기로 일본군이 순차적으로 철수하면서 7년간의 전쟁은 끝이 났다. 그러나 김해는 일본군이 최후까지 주둔하였던 지역이었다.

[결과]

임진왜란 초기에 김해 지역은 일본군의 주요한 진격로였으며, 전쟁 동안 계속 일본군 침략의 주요 교두보로 활용되었다. 따라서 김해 지역 주민들은 전쟁 중에 일본군에게 많은 부담과 희생을 강요당하였다. 특히 일본군이 김해 지역에 죽도 왜성, 마사 왜성, 신답 왜성 등의 왜성을 축조하였는데, 지금까지 임진왜란의 흔적으로 남아 있다.

한편 김해는 임진왜란 초기에 사충신을 중심으로 적극적인 의병 항쟁을 전개한 지역이었고, 전쟁에서 활약했던 인물들은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이름을 올렸으며, 임진왜란 때 창의한 의병을 기리는 사충단(四忠壇)송담서원(宋潭書院) 등이 건립되었다. 또 의병장의 공적을 기리는 실기(實記)와 유사(遺事) 등이 기록물로 만들어져 전해오고 있다.

[의의와 평가]

임진왜란은 조선에 큰 영향을 주어 사회 변화의 계기가 되었다. 김해 지역에서는 임진왜란 때 일본군의 침략과 전투 과정에서 많은 희생자를 냈으며, 도공(陶工) 등이 포로로 일본에 끌려갔다. 또 군공(軍功)이나 납속(納粟) 등으로 신분 상승이 일어나 신분 제도에 일정한 변화가 나타나기도 하였다. 속오군(束伍軍)이 전쟁 중에 편성되어 김해 지역 지방군의 주력이 되면서 하층민도 군인이 되었다. 김해 지역의 토지 결수(結數)는 전쟁으로 황폐화되어 크게 축소되었다. 하지만 전쟁 이후 조선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서 성리학 질서를 강조하면서 김해 지역에서도 서원(書院), 사우(祠宇), 정려(旌閭)가 건립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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