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400324 |
---|---|
한자 | 金海城戰鬪 |
영어공식명칭 | Battle of Kim Hae-Castle |
이칭/별칭 | 김해읍성 전투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상남도 김해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김강식 |
발생|시작 시기/일시 | 1592년 4월 19일 - 김해성 전투 발발 |
---|---|
종결 시기/일시 | 1592년 4월 20일 - 김해성 전투 종결 |
발생|시작 장소 | 김해성 - 경상남도 김해시 동상동 |
종결 장소 | 김해성 - 경상남도 김해시 동상동 |
성격 | 전투 |
관련 인물/단체 | 서예원|송빈|이대형|김득기|류식 |
[정의]
임진왜란 때 경상남도 김해시 동상동 일원의 김해성에서 있었던 조선군과 일본군의 전투.
[개설]
임진왜란 초기에 김해 지역은 일본군 제3군의 침략로에 있었다. 이에 김해성을 둘러싸고 4월 19~20일에 걸쳐 격렬한 전투가 전개되었다. 비록 수적인 열세로 함락되었지만, 김해부사 서예원의 도망 이후에도 지역의 군·관·민은 끝까지 김해성을 지키다가 전사했다. 전쟁 초기에 김해성 전투는 일본 3군[구로다 나가마사 군]에게 조선인의 강렬한 항쟁을 인식시킨 전투였다.
[역사적 배경]
조선 전기에 김해 지역은 낙동강 유역에 위치하고 있어서 왜구의 약탈을 당하던 지역이었다. 16세기 말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왜변(倭變)으로 단절되었던 조선과의 교역 문제점을 외교적으로 해결하려 하지 않고 군사력으로 타개하기 위해 침략을 시작하였다. 반면 조선은 건국 후의 안정 속에서 국방을 소홀히 하였으므로 지방의 군사 방어 체제와 군사 동원에서 많은 문제점이 드러나고 있었다. 김해 지역에서도 군정(軍政)이 문란해져서 필요한 군사 수를 제대로 확보하지 못하였다. 이에 지방의 방어 체제인 진관제(鎭管制)를 제승방략(制勝方略) 분군법으로 바꿀 수밖에 없었다.
[경과]
일본군은 동래부를 1592년 4월 15일 점령한 이후에 순차적으로 부산에 상륙하여 3로로 나누어 북쪽으로 침략하였다. 일본 제1군이 밀양으로 진격할 무렵인 19일에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가 지휘하는 제3군 11,700명이 부산 앞바다에서 해상으로 기동하여 녹산포를 거쳐 죽도[서낙동강] 인근의 불암창에 상륙하였다. 서예원은 초선(哨船)을 띄워 놓고 적정을 탐색하고 있었으므로, 일본군은 먼저 배를 빼앗은 후 조총을 쏘면서 육상으로 공격해 올라왔다. 조선 감시병들은 싸우다 물러나 김해성 안으로 들어갔다. 김해성의 조선군은 주장 김해부사 서예원(徐禮元), 중위장(中衛將) 초계군수 이유검(李惟儉)이 거느린 군사들과 지역의 의병이 중심이었다. 반면에 일본군은 제3군 주장 구로다 나가마사, 요장(僚將) 오토모 요시무네[大友吉統] 등 약 11,700명이었다. 영산에서 군사를 지원해 줄 수 있었던 경상감사 김수(金睟)는 각 읍에 격문을 보내어 백성들을 피난시키고, 자신은 낙동강을 건너 경상우도의 내륙으로 도주하였다. 또 김해를 군사적으로 관할하던 경상우병사 조대곤(曺大坤)은 창원의 마산포에 있었지만, 구원하지 못하고 관망하다가 진을 버리고 달아났다.
일본군의 제3군은 김해성으로 이동하여 이중으로 성을 포위하였다. 이에 부사 서예원은 비상경계 태세를 갖추고 각처를 순시하면서 전투를 독려하였다. 이유검은 서문을 지키면서 직접 일본군과 접전하였다. 당시 김해읍성의 성벽은 높고 호지(濠池)가 깊어서 쉽게 함락되지 않았다. 일본군은 성의 공격이 쉽지 않자 성 주변의 보리밭에서 보리 이삭을 모았으며, 민가에 있는 볏짚을 날라와서 야밤에 몰래 성호(城壕)를 메우기 시작하였다. 동문 사관(射官) 백응량(白應良)은 대궁(大弓)으로 일본군 부장을 말 위에서 떨어뜨리고, 삼시삼중(三矢三中)으로 일본군의 사졸을 쏘아 넘어뜨렸다. 그러나 준비된 화살이 부족하였고 외부의 지원도 없었으며, 서예원의 전의도 굳지 못하였기 때문에 해가 지자 군사들의 사기는 떨어졌다. 더욱이 밤에 이유검이 거짓으로 야경(夜警)을 칭하고 도망쳐 버렸고, 뒤늦게 이를 안 서예원도 이유검을 잡으러 간다는 핑계로 도망하여 강창(江倉)에서 배를 타고 진주로 달아났다. 병사들은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면서 있는 화살을 모두 쏘아버린 다음, 서·남·북문으로부터 한두 명씩 도망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김해 지역의 의병은 끝까지 싸웠다. 송빈(宋賓)은 친구 이대형(李大亨)·김득기(金得器)·류식(柳湜) 등과 함께 장정 수백 명을 모아서 김해성으로 들어가서 중군(中軍)을 맡았다. 이대형 등도 각각 성문을 나누어 지켰으며, 이인지(李麟趾)는 군량을 맡았다. 부사 서예원 등이 도망한 후 분격한 송빈은 영남의 곡창이며 요충인 김해성을 사수할 것을 맹세하였다. 19일 밤에 일본군은 허수아비를 만들어 성 안으로 던져서 군사들을 교란시켰다. 또 일본군은 호계천[동상동과 부원동을 흐르는 시내] 상류를 막아 성 안의 물을 끊었다. 사람들은 갈증으로 고통을 겪었으며, 항복하자는 사람도 있었다. 남은 군사들은 성 문을 굳게 닫아걸고 죽기 살기로 싸웠지만, 마침내 동문으로 진입한 일본군과의 치열한 백병전이 벌어졌다. 송빈 등은 투항을 권고하는 일본군을 꾸짖으며, 남은 군사와 백성을 이끌고 싸우다 순절하였다. 수령이 없는 김해성은 4월 20일 새벽에 함락되었다.
[결과]
김해성을 지키기 위해 싸운 사충신을 비롯한 많은 인원이 희생되었다. 김해 지역은 임진왜란 초기부터 일본군의 주요한 진격로로 이용되었으며, 일본군의 주요 교두보로 활용되었다. 따라서 전쟁 기간 내내 김해 지역민들은 일본군에게 많은 부담과 희생을 강요당하며 살아야 했다.
[의의와 평가]
임진왜란 초기 전개된 김해성 전투는 관군과 의병 및 군민이 일본 대군에 맞서 싸운 격렬한 항쟁이었다. 김해성의 조선군은 일본군에 비해 군사 수나 무기 면에서 비교가 되지 않았지만, 일본군과 대결하여 이틀 동안을 버텼다. 비록 김해성이 수적 열세로 함락되었지만, 사충신이 중심이 되어 자발적이고 적극적으로 항쟁을 전개하였던 지역이었다. 김해성의 항쟁은 7년에 걸친 전쟁에서 일어났던 의병 활동의 출발점이 되었으며, 다른 지역의 의병 항쟁을 촉발시키는데 기폭제가 되었다는 의의가 있다.
한편 일본 제3군 구로다 나가마사 군은 김해성을 점령한 이후 창원성을 공략하였고, 낙동강을 건너 영산·창녕의 낙동강 좌측을 장악하면서 북상하였다. 경상우도로 침입하여 4월 27일 성주를 함락시켰고, 김해는 일본군의 후방 거점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