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4003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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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治所城 |
영어공식명칭 | Chiso |
이칭/별칭 | 읍성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제도/법령과 제도 |
지역 | 경상남도 김해시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안성현 |
[정의]
조선 시대 경상남도 김해 지역에서 행정 사무를 맡아보는 기관이 있었던 성곽.
[개설]
조선 시대 치소인 읍성의 사전적 의미는 “지방의 부(府)·군(郡)·현(縣) 등 행정 관서가 마련된 고을에 축조되어 유사시에 외적을 대비하는 한편, 행정적 편의를 제공한 성곽을 지칭" 하는데, 기원에 대해서는 통일 신라 시대나 고려 시대로 보는 등 다양한 견해가 존재하며, 평지에 읍성이 축조되기 이전까지는 산성에 치소가 있었다고 알려져 왔다.
최근 산성 치소설과 반대되는 견해가 속속 발표되고는 있으나 대부분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산성에서 평지로 이동되는 시기에 대해서는 큰 관심이 없었다. 삼국 시대에는 산성을 치소로 활용하였으나 통일 신라부터 평지에 토성이 축조됨으로써 평지에 치소를 두는 사례가 늘어나게 되었으며, 이러한 양상은 고려 시대로 이어졌다. 조선 전기에 와서 연해 지역을 중심으로 읍성이 축조됨으로써 평지에 치소를 두는 것이 일반화되었다. 조선의 읍성은 개항기까지 경영되었으나 1910년 일본의 ‘읍성 철거령(邑城 撤去令)’ 때문에 대부분 원형을 잃고 훼손되었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수비 방책은 청야입보 이일대로책(淸野入保 以逸待勞策)이었다. 통일 신라 시대부터 강이나 바다에 인접한 구릉에 토성이 축조되었는데, 이를 ‘고읍성’이라고 부른다. 평지 토성은 치소성으로 활용되는 것과 교통로를 통제하는 것으로 나누어지는데, 이러한 양상은 고려 시대에 와서 두드러졌다.
다만, 고려 후기에 왜구의 침입으로 인하여 연해 지역과 침입 우려가 있는 내륙 지역에 대한 축성이 대대적으로 이루어졌다. 특히 우왕 통치기에는 왜구의 침입이 빈번해지자 각 도의 요충지에 방호를 설치하여 유민을 막고 연해 주군에 산성을 수축하도록 하였다. 따라서 읍성의 입지를 선택할 때 사방과의 거리가 균평하고 방어의 편의를 중요시 하게 되었고, 광활한 평지보다는 험준한 곳, 해수나 천류가 휘둘러진 곳을 택함으로서 자연적인 지형 조건이 읍성의 방어 능력을 제고시킬 수 있도록 하였다.
주위에 토지가 비옥하여 충분히 경작할 만한 곳들을 읍성의 입지로 선정하여 유사즉고문방어(有事則固門防禦) 무사즉진추전야(無事則盡趨田野)라는 목적으로 읍성을 축조하였던 것은 국력이 신장하였던 조선 태종대 이후라고 할 수 있다.
[관련 기록]
조선 시대 치소가 위치한 성을 지칭하는 용어는 읍성을 꼽을 수 있다. 이외 현성(縣城)·군성(郡城)·주성(州城) 등과 같이 해당 읍격 뒤에 ‘성(城)’을 연서(連書)한 경우와 ‘현’·‘군’ 등의 읍격을 생략한 채 주, 군, 현명에 ‘성’을 이어 쓴 것 등을 들 수 있다. 관찬 지리지에 기록된 공식적인 명칭은 읍성이었다. 즉,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의 총설 부분에 읍성이 기록되어 있다. 다만, 군현 별로 각종 항목을 기록한 각론에 앞서 도 내 전체 현황을 소개하는 부분에서, 경상도 소재 읍성을 산성(山城)과 더불어 일괄 기재하였다.
한편, 『세종실록(世宗實錄)』 지리지(地理志)에는 치소가 위치한 성을 읍성(邑城), 읍토성(邑土城), 읍석성(邑石城), 읍벽성(邑壁城)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축성 재료에 따라 구분하여 기재되었다. 이러한 양상은 이후에도 유사하게 적용되었다. 특히 『경국대전(經國大典)』은 지방의 성보(城堡)를 읍성, 산성, 행성(行城)으로 구분하였다. 이처럼 읍성은 조선시대 치소가 위치한 성을 지칭하는 공식 용어였음을 알 수 있다.
고려 시대에는 읍성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당시 치소 역할을 한 성은 현성(縣城), 주성(州城) 등과 같이 해당 읍격(邑格) 뒤에 ‘성’이 연서되거나, ‘현’ 등의 읍격이 생략된 채 군현명에 ‘성’이 이어 기록되거나, 혹은 이칭(異稱)으로 표현되곤 하였다. 고대에도 유사한 양상이 확인된다.
김해 읍성에 대한 문헌 기록에 의하면 1434년(세종 16)에 축조되었으며, 1451년(문종 1) 삼도체찰사(三道體察使) 정분(鄭苯)의 서계(書啟)에 의하면 “읍성은 세종 16년 동[해동문(海東門)]·서[해남문(海南門)]·남[진남문(鎭南門)]·북[공진문(拱辰門)]의 4대문이 있었으며, 옹성이 4개소, 여장이 931개였으며, 성내에는 개천 1곳, 우물 28곳, 둘레는 4,418척, 해자 둘레 4,683척”이라고 하였다. 이후 1895년(고종 32) 이후 대부분 철거되었다. 내부에는 객사[분성관(盆城館)]를 비롯한 아사[어목당(禦牧堂)], 향청, 내장대, 군관청, 토포청, 인리청, 의군, 서역소, 노방, 상하방, 교방, 호적고, 대동고, 관청고, 경창, 읍창, 군기고, 진휼고 등이 있었으며, 조선 후기에는 별중영(別中營)도 운영되었다. 하지만, 공해(公廨) 시설의 정확한 위치와 구조는 알 수 없다.
[내용]
김해 지역에는 늦어도 신석기 시대부터 현재까지 인간의 활동이 이루어졌으며, 시기별로 활용된 공간은 달랐으므로 치소 역시 같은 곳에 있지 않았다.
금관가야 때에는 왕성인 봉황토성을 중심으로 김해 지역을 아우르는 관방 체계가 존재하였다. 왕성의 서쪽 성벽의 진행 방향에 대해서는 약간의 이견이 있지만, 왕성이 먼저 축조된 이후 외곽의 보루와 목책성을 축조하였다. 최근 봉황대의 동쪽 말단부에서 5세기 중반에 해당하는 규모 10×10m인 중층으로 추정되는 적심 건물지 1동이 조사되었다. 건물지의 성격에 대해서는 명확하지 않지만, 특수 목적으로 축조되었던 것은 분명하다. 금관가야 때 봉황대와 5세기 중반경에 축조된 왕성인 봉황토성이 가지는 중요성을 알 수 있다.
금관가야가 신라에 복속된 이후에는 양동산성과 천곡성, 마현산성 및 분산성이 축조되었다. 전자는 신라의 서진, 후자 중 분산성은 치소로서의 기능을 수행하였다. 금관가야가 신라에 복속된 이후부터 분산성이 축조되었던 시기까지 100여 년의 차이가 있는데, 그 사이의 치소는 알 수 없다. 분산성은 김해 고읍성이 축조되기 이전까지 치소성의 기능을 한 것으로 판단된다.
통일 신라 후기에는 고읍성이 축조되었는데, 규모는 둘레 약 5,400m 정도로 이 시기 축조되었던 경상남도 지역의 다른 토성보다 대형이었다. 고읍성이 축조된 이후부터 분산성은 배후 산성으로 성격이 바뀌게 되었다. 조선 시대에는 1434년(세종 16) 김해 읍성이 축조되면서 치소가 이동하게 되었으며, 대한제국 때 읍성이 폐성될 때까지 유지되었다.
[변천]
경상남도 지역 치소성은 시기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특히 경남 지역은 신라에 복속되기 이전 가야의 소국들이 위치하였다. 이중 금관가야는 평산성에 가까운 왕성[봉황토성]을 방어하기 위한 방어 체계가 완성되어 있었다. 신라가 가야를 복속한 후 기왕의 왕성을 재활용하였는지 새로운 치소를 축조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이후 분산성을 축조한 후 치소로 사용하였다. 통일신라 후기에 김해 고읍성이 축조됨으로써 분산성은 배후산성으로 기능이 변하게 되었으며, 조선 전기에는 고읍성이 폐기되었다. 1434년(세종 16) 김해 고읍성 내부에 김해 읍성이 축조되었고, 1895년(고종 32) 읍성이 폐기될 때까지 치소로 활용되었다.
[의의와 평가]
고읍성과 김해 읍성은 성벽을 중심으로 조사가 이루어졌으나 내부 시설에 대한 정보는 빈약한 편이므로 발굴 조사를 통해 많은 사실을 밝혀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