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채보상운동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400408
한자 國債報償運動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남도 김해시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하지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07년 3월연표보기 - 김해 국채보상운동 전개
성격 사회 운동
관련 인물/단체 조민승|김서창|한응규

[정의]

1907년 경상남도 김해 지역에서 전개된 국권 회복 운동.

[역사적 배경]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고 통감부가 설치되자, 일제는 강제로 차관을 들이며 조선의 경제권을 장악하고자 하였다. 1906년 대일 국채가 1,300만 원까지 늘어나자, 국민의 힘으로 일본의 차관을 갚자는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났고, 1907년에는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경상남도 지역에서는 25,000여 명이 참가하여 16,000여 원의 의연금을 거두었는데, 김해에서도 400여 명이 참여하여 약 250원을 모금하였다.

[경과]

김해 지역에서는 1907년 3월 조민승(曹旼承) 등 50여 명의 군민이 56환 60전을 납부하였다. 이어 5월에는 읍내 좌부면 동정리 주민 11명이 의연금을 납부하였으며, 나아가 면 단위 지역민들도 대거 참여하였다. 특히 명지면에서는 6월 전 의관 김서창(金瑞昶)과 전 군수 한응규(韓應奎)를 중심으로 국채보상동맹소(國債報償同盟所)를 결성하여 「국채보상취지서」를 발표하였는데, 그 결과 주민 111명이 의연금 63원 30전을 납부하는 성과를 보였다.

1907년 6월 7일 자 『대한매일신보』에 실린 명지면 「국채보상취지서」에 따르면, “국채를 갚지 않으면 독립의 기초를 공고히 할 수 없다”라고 하면서 국채보상운동 동참 의지를 밝히고 있다. 이처럼 명지면에서 지역민이 대거 동참한 국채보상운동이 전개될 수 있었던 이유는, 명지면이 조선 시대 굴지의 소금 생산지로 자금 유통이 원활하였던 데다가, 개항 이후 일본인들의 투자와 신문물 유입이 빨랐던 점을 지적할 수 있다.

[결과]

국채보상운동으로 전국적으로 모은 돈은 20만 원 정도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모금된 돈을 은행이나 학교 설립, 식산 진흥 등에 사용할 수 있도록 다양한 논의를 진행하였으나, 강제 병합 직후 모금액 전부를 일제에 빼앗기면서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의의와 평가]

김해 지역 국채보상운동은 자발적인 대중 운동으로, 김해 지역민의 애국심과 항일 정신을 고취시킨 항일 민족 운동이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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