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4004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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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愛國啓蒙運動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상남도 김해시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하지영 |
[정의]
개항기 경상남도 김해 지역에서 전개된 실력 양성 운동.
[역사적 배경]
러일전쟁 이후 일본 제국주의자의 조선 침략이 본격화하자, 조선 내에서는 이에 대한 저항이 각계각층에서 일어났다. 애국계몽운동은 조선의 ‘힘’과 ‘실력’이 부족하였기 때문에 일본에 ‘국권’을 박탈당하였다는 인식에 기반을 둔 것으로, ‘힘’을 길러 빼앗긴 국권을 다시 찾자는 운동이었다. 이때 그 ‘힘’은 ‘교육’과 ‘식산’의 진흥을 통해 축적할 수 있다고 보았다. 김해 지역 역시 전국적인 흐름에 맞추어 애국계몽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경과]
유림이나 관료, 기독교인 등 김해의 개명한 인사들은 근대 학교를 설립하여 일제의 침탈에 대응하는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고자 하였다. 한말 김해에서 교세가 가장 컸던 학교는 명지면에 설립된 사립 동명학교(東鳴學校)이다. 동명학교는 명확한 설립 시기는 알 수 없으나, 1909년경 재학생 수가 100여 명에 달하였다고 한다. 교사 자격을 갖춘 10여 명의 선생이 학교를 운영하였으며, 한문에 능통한 학생이 많았다고 한다.
이 외에도 1907년 상동면에 전 주사 조의승(曺儀承)이 설립한 광흥학교(光興學校)가 개교하였으며, 1908년 1월에는 생림면에 조양의숙(朝陽義塾)이 문을 열었다. 6월에는 읍내 좌부면에 농무기술학교(農務技術學校)와 향명학교(向明學校)가 세워졌으며, 11월에는 유지들이 계명학교(溪明學校) 설립을 발기하고 학교 운영을 위한 의연금 모집에 나섰다. 1909년 읍내에 합성학교(合成學校)가 설립되어 정식으로 인가받았는데, 1907년 김해교회 배성두(裵聖斗) 장로와 선교사 스미스(W. E. Smith)가 설립한 학교로, 오늘날 김해합성초등학교의 전신이다.
1909년 12월 학부에 인가된 김해 지역 사립 학교는 9개 학교로, 동래의 19개교, 밀양의 12개교 다음으로 많은 수였다. 1910년 3월에는 하계면에서 일어학교(日語學校) 설립이 발의되었고, 4월에는 명지면에 신명학교(新鳴學校), 6월에는 하계면에 진영학교(進永學校)가 설립되는 등 여러 신식 학교가 설립되었다. 이 외에 기독명덕여학교(基督明德女學校) 등이 설립되면서 여성을 위한 교육과 신학문 보급도 이루어졌다.
이와 함께 한말 대표적인 애국계몽운동 단체의 김해지회가 설립되면서 학회를 통한 지역민들의 계몽 운동도 전개되었다. 이들 학회는 교육 진흥과 식산흥업을 통해 국권을 회복하려는 목적으로 설립되었는데,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 대한협회(大韓協會), 교남교육회(嶠南敎育會) 등이 대표적이다. 여기에는 김해 지역을 대표하는 김해 김씨, 김해 허씨 집안을 비롯하여 분성 배씨 등의 향임층과 광주 안씨(廣州 安氏), 광주 노씨(光州 盧氏) 등의 사족층, 그리고 관직에 있던 인물들이 주로 참여하였다. 이들은 근대적 학교나 회사를 설립하여 경영하였으며,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에 동참하기도 하였다.
한편, 통감부 설치 이후 일제가 강제로 차관을 들이며 조선의 경제권을 장악하려고 하자, 이에 저항하는 국채보상운동이 김해를 비롯한 전국에서 일어났다. 김해 지역에서는 1907년 3월 조민승(曹旼承) 등 50여 명의 군민이 56환 60전을 납부한 것을 시작으로, 5월에는 읍내 좌부면 동정리 주민 11명이 의연금을 납부하였다. 6월에는 명지면에서 국채보상동맹소(國債報償同盟所)가 결성되어 「국채보상취지서」를 발표하는 등 김해군 내 각 면의 지역민이 참여하였다.
[의의와 평가]
개항기 김해 지역에는 경상남도 다른 지역에 비해 많은 수의 사립 학교가 설립되었다. 또 대한자강회나 대한협회, 교남교육회 같은 단체의 김해지회가 설립되어 근대적 학교·회사 설립 운동과 국채보상운동 등이 전개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김해 지역에서 유력 인사를 중심으로 한 애국계몽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음을 말하여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