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400410
한자 三一運動
이칭/별칭 삼일운동,기미만세운동,삼일만세운동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남도 김해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전성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19년 3월 29일 - 김해 읍내 만세 시위 발생
전개 시기/일시 1919년 3월 31일 - 진영리장터 만세 시위 발생
전개 시기/일시 1919년 4월 2일 - 김해장터 만세 시위 발생
전개 시기/일시 1919년 4월 12일 - 무계리장터 만세 시위 발생
종결 시기/일시 1919년 4월 16일 - 김해면 이동리 만세 시위 발생
발생|시작 장소 김해 읍내 만세 시위 - 경상남도 김해시
종결 장소 김해면 이동리 만세 시위 - 경상남도 김해시 이동 지도보기
성격 독립운동
관련 인물/단체 구명순|배덕수|김우현|김종훤|김승태

[정의]

1919년 3월부터 4월까지 경상남도 김해 지역에서 일어난 독립운동.

[역사적 배경]

일본의 강압에 의해 체결된 조일수호조규에 따라 부산이 개항되자, 일본인들은 부산에 이주하여 거류지를 형성하였고, 나아가 정주를 위한 시가지를 조성하였다. 그리고 부산 인근 농촌 배후지인 김해는 일본인들의 대농장이 설치되며 경제적 침탈이 진행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김해 지역에서는 3·1운동이 다른 지역에 비해 비교적 활발히 일어나게 되었다.

[경과]

고종 인산일인 1919년 3월 1일에 서울과 평양에서 시작되어 전국으로 확대된 3·1운동은 김해 지역에도 영향을 미쳤다. 김해 지역 3·1운동은 수면인 김해면과 경부선 건설 이후 성장하고 있었던 하계면[현 경상남도 김해시 진영읍]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3월 13일, 전국적인 만세 시위와 연동하여 읍내에서 시위가 계획되었으나, 사전에 일본 헌병에 발각되어 실행되지 못하였다. 다시 부산부와 동래군 등 인접 지역 만세 시위 소식에 영향을 받아 3월 28일에도 시위 계획이 세워졌으나 역시 실행되지 못하였다.

김해 지역 첫 만세 시위는 다소 늦은 3월 29일 밤 10시 김해 읍내 종로 한복판에서 일어났다. 시위 주체는 알 수 없으나, 『매일신보』 기사에 의하면 약 50~60명의 군중이 만세를 불렀고, 곧바로 일본 헌병에 의해 진압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김해 읍내 만세 시위는 다음 날에도 이어졌다. 3월 22일 서울에서 만세 시위를 경험하고 김해로 귀향한 정신여학교 학생 구명순은 3월 30일 밤 9시경 읍내 기독교 예배당의 기독교 여성 수 명과 함께 김해군청 앞 도로에서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를 전개하였다. 또한 김해청년회원인 배덕수도 이에 호응하여 김해군청 앞에서 독립 만세를 고창하고, 북문 밖 답곡리 부근 십여 개소를 다니며 주민들에게 시위에 참여하도록 독려하였다.

이후 만세 시위는 3월 31일 진영리장터 만세 시위와 4월 2일 김해장터 만세 시위를 기점으로 김해 지역 오일장 네트워크를 따라 인근 면으로 확대되어 갔다. 3월 31일 하계면 진영리장터 만세 시위는 김해 지역 첫 시위인 김해 읍내 만세 시위가 일어난 3월 29일부터 준비되었다. 인근 각지의 시위 소식을 접한 면서기 김우현 등 진영 지역 청년들이 3월 31일 진영리 장날을 기하여 대대적인 만세 시위를 전개하였다. 미리 준비한 포(布)로 만든 태극기를 장대 위에 게양하고, 종이로 만든 태극기와 ‘독립 만세’라고 적은 종이 수십 매를 배포하며 만세를 외치자, 장터에 모인 약 200명이 시위에 동참하였다. 일본 헌병이 김우현 등을 검거하고 해산시켰지만, 진영 지역 만세 시위는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4월 3일에도 진영에서 300여 명의 군중이 모여 만세 시위를 전개하였다. 일본 헌병만으로 진압이 어려웠는지 일본인 재향군인까지 함께 시위 진압에 나서 2명을 검거하고 시위대를 해산시켰다. 하지만 진영 지역의 만세 시위는 더욱 심화하였다. 곧이어 장날인 5일에 다시 만세 시위가 벌어졌다. 오후 5시경 약 300명의 군중이 장터에 모인 가운데 만세 시위가 시작되었다. 일본 헌병은 시위대를 해산시키는 한편, 도검을 휘둘러 부상을 입히며 주동자를 체포하였다. 하지만 시위 군중은 약 2천 명[『매일신보』에 의하면 6천 명]으로 오히려 늘어났고, 진영헌병주재소로 몰려가 투석하며 저항하였다. 일제는 부산에서 하사 이하 9명의 군인을 파견하여 시위를 강경 진압하였다.

한편, 4월 3일 장유면 신문리장터 시위 계획과 12일 약 2천 명[『매일신보』에 의하면 3천 명]의 지역민이 참여한 장유면 무계리장터 만세 시위도 장날 시위의 연쇄였다. 무계리장터 만세 시위는 3월 말부터 4월 초까지 김해 지역에서 전개된 시위의 연쇄 과정이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대규모 시위였다. 4월 11일 장유면 무계리[현 김해시 무계동]에서 김종훤, 김승태 등 수 명이 12일 무계리 장날을 기하여 만세 시위를 계획하고, 각자 마을 사람을 설득하여 실행에 옮겼다. 무계리장터에는 약 2천 명의 지역민이 모였고, 곧바로 구한국기를 앞세우고 만세 시위를 전개하며 무계리 내를 행진하였다. 처음부터 일본 헌병의 강경한 진압과 발포가 이루어졌다. 그러자 장터에 모인 지역민들은 헌병주재소로 몰려가 항의 시위를 벌였고, 다시 일본 헌병이 발포하여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였다.

이외에도 김해 지역에서는 4월 3일 또는 4일 생림면 봉림리, 4월 초순 녹산면 생활리[현 부산광역시 강서구 생곡동], 4월 10일 명지면[현 부산광역시 강서구 명지동] 중리, 4월 11일 명지면 진목리, 4월 16일 김해면 이동리에서 각각 만세 시위가 이어졌다. 이 가운데 특히 주목되는 시위는 4월 10일과 11일의 명지면 만세 시위와 4월 16일의 김해면 이동리 만세 시위이다. 명지면 만세 시위는 명정학교 등의 학생이 중심이 되어 전개하였고, 김해면 이동리 만세 시위는 김해 지역 마지막 시위로 30~50명의 여성에 의한 시위였다. 일제는 여성들의 만세 시위를 군을 동원하여 발포하며 무차별 진압하였다.

[결과]

김해 지역 3·1운동은 4월 3일과 4일의 생림면 봉림리 만세 시위를 자료의 오류로 간주하고 동일한 사건으로 보면, 만세 시위 12회, 계획 3회로 군 단위 3·1운동 중 상당히 활발하였음을 알 수 있다. 김해와 진영을 축으로 6개 면의 수많은 지역민이 참여하였으며, 일본 헌병의 총포와 도검에 의한 진압이 3회에 이르는 등 가열차게 진행되었다.

[의의와 평가]

김해 지역 3·1운동은 오일장 네트워크를 이용하여 전개되었다는 지역적 특성을 보인다. 또한, 3월 30일 초기 만세 시위와 4월 16일 마지막 만세 시위는 여성이 중심이 된 시위로 특별한 의미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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