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400414
한자 下界面 進永里 萬歲運動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남도 김해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하지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19년 3월 31일연표보기 - 제1차 하계면 진영리 만세운동 발생
발생|시작 시기/일시 1919년 4월 3일연표보기 - 제2차 하계면 진영리 만세운동 발생
발생|시작 시기/일시 1919년 4월 5일연표보기 - 제3차 하계면 진영리 만세운동 발생
성격 독립운동
관련 인물/단체 김우현|김성도|김정태|김용환|안기호|김종만

[정의]

1919년 3월~4월 지금의 경상남도 김해시 진영읍 진영리에서 일어난 독립운동.

[역사적 배경]

김해 서쪽의 하계면[현 경상남도 김해시 진영읍]은 낙동강 유역에 자리 잡은 곡창 지대로, 개항 이후 이주한 일본인들을 중심으로 대규모 농장이 조성되었다. 그리고 1905년에는 마산선 철도가 가설되면서 진영역이 설치되는 등 도로·철도망을 갖춘 교통의 요지로 발전하여 갔다. 일제 강점기 김해군 내에서도 일본인들의 경제적 침탈이 특히 많았던 지역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때문에 일제에 저항한 만세 시위도 적극적으로 전개되었다.

[경과]

하계면 진영리 만세운동하계면 면서기 김우현(金禹鉉)이 김성도(金成濤), 김정태(金廷泰), 김용환(金容煥)과 함께 계획하면서 시작되었다. 1919년 3월 31일 진영리 장날을 거사일로 정한 김우현 등은 돈을 갹출하여 비용을 마련하고, 옥양목과 한지 등을 구입하여 태극기를 만드는 등 거사를 준비하였다. 거사 당일인 3월 31일 오후 1시경 진영리장터는 장을 보러 온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김우현 등 청년들은 군중에게 종이 태극기를 나누어 주고 ‘독립만세’라고 쓴 전단을 뿌리면서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장터에 있던 200여 명의 군중이 이에 호응하였다. 하지만 일제 헌병이 출동하여 김우현 등을 검거하였고, 군중은 사방으로 흩어졌다.

진영리에서는 3월 31일 시위에 이어 4월 3일에도 300여 명의 군중이 모여 만세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때도 헌병이 출동하여 제지하였고, 시위는 크게 확산되지 않았다. 이어 4월 5일에는 하계면 서당에 다니던 안기호(安騏鎬), 김종만(金鍾萬)을 중심으로 만세 시위가 일어났다. 진영리 장날인 5일 오후 2시경 태극기를 흔들며 하계고개를 출발한 안기호 등 학생들이 장터에 도착하였을 때, 시장은 2,000여 명의 군중으로 가득 차 있었다. 만세를 외치며 시장 곳곳을 행진하던 군중이 진영헌병주재소로 몰려가자 헌병들은 착검한 채 해산을 종용하였고, 이 과정에서 부상자가 속출하였다.

[결과]

하계면 진영리에서 일어난 3차례의 만세 시위로 김우현과 김성도, 김정태, 김용환[이상 1차 시위], 안기호와 김종만[이상 3차 시위] 등 다수의 사람이 연행되거나 구속되었고, 부상자도 발생하였다.

[의의와 평가]

하계면 진영리 만세운동은 김해 지역 내에서도 비교적 규모가 컸던 만세 시위로, 개항 이래 왕성하게 진행되었던 낙동강 유역 토지 침탈과 약탈적 지주-소작 관계의 형성과 같은 일제의 경제적 침탈에 저항한 지역민들의 항일 독립운동이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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