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40046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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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四友堂先生文集 |
영어공식명칭 | Saudangseonsaeng-munjip |
이칭/별칭 | 『사우당집』 |
분야 | 역사/근현대,문화유산/기록 유산 |
유형 | 문헌/전적 |
지역 | 경상남도 김해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구진성 |
편찬 시기/일시 | 1911년 - 『사우당선생문집』 편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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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 시기/일시 | 1917년 5월 - 『사우당선생문집』 간행 |
소장처 | 원광대학교 도서관 - 전북특별자치도 익산시 익산대로 460[신동 272] |
성격 | 시문집 |
저자 | 조이추 |
간행자 | 조병돈 |
권책 | 3권 1책 |
행자 | 10행 20자 |
규격 | 30.6×20.7㎝|19.8×16.1㎝[반곽] |
어미 | 상하이엽화문어미(上下二葉花紋魚尾) |
[정의]
1917년에 간행된 조선 후기 경상남도 김해 출신 유학자 조이추의 시문집.
[저자]
조이추(曺爾樞)[1661~1707]의 자는 원경(元卿), 호는 사우당(四友堂)이다. 김해 활천리에서 태어났다. 고려 때 남평군(南平君)에 봉해진 조용기(曺用奇)의 후손이다. 아버지는 조전(曺恮), 어머니는 진양 유씨(晉陽 柳氏)이다. 증조할아버지는 동부참봉(東部參奉) 조원해(曺元海)이고, 할아버지는 찰방(察訪) 조덕여(曺德輿)이다. 동생은 모우당(慕友堂) 조이극(曺爾極)이다.
조이추는 10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12세에 어머니를 잃었다. 젊어서는 무과에 뜻을 두고, 활쏘기와 말타기를 익히다가 문을 닫고 독서에 힘써 학문을 닦았다. 손수 퇴계 이황의 「성학십도(聖學十圖)」를 그려 스스로를 반성하고, 학규(學規) 십여 조목을 적어 벽에 붙이고, 경계와 수양의 도구로 삼았다고 한다.
고을의 회로당(會老堂)은 탁영 김일손과 남명 조식의 가르침이 전해지는 곳이었으나, 임진왜란 이후 다소 침체해 있었다. 그래서 조이추는 몇몇 동지들과 향약 14조를 제정하여 고을 풍속을 바로잡는 데 힘썼다. 또한 폭풍이나 홍수로 재난 당하는 주민들을 위해 사창(社倉)을 설치하여 먼저 재물을 출연하였고, 주민들의 생계 안정을 위해 힘썼다. 1707년 47세로 사망하자, 1709년 사림들이 공론으로 제향을 받들었다. 일암(一庵) 신몽삼(辛夢參)과 식산(息山) 이만부(李萬敷)가 봉안문(奉安文)과 상향문(常享文)을 지었다.
[편찬/간행 경위]
『사우당선생문집(四友堂先生文集)』 끝에 붙어 있는 간기(刊記)에 의하면, 1917년(대정 6) 5월 김해 상동면 묵방리 3통 1호 조병돈(曺秉敦) 집에서 인쇄, 발행되었다. 그러나 1911년 12월 하순경 작성된 발문을 보면, 발문이 작성되기 이전 간행된 것으로 판단된다. 조이추의 6세손 조우승(曺禹承)과 7세손 조병윤(曺秉允)이 작성한 발문에 의하면, 조이추의 문집은 한 문생이 간행하려고 하다가 뜻하지 않게 원고가 유실되었고, 이후 후손들이 이 집안에서 전하는 유고를 최대한 수습하고, 조이추의 전기 자료 및 서원 문자 등을 3권으로 엮어서 조병돈의 주도로 간행하였다고 한다. 『사우당집(四友堂集)』이라고도 불린다.
[형태/서지]
3권 1책의 목판본으로, 선장본으로 되어 있다. 판식은 사주쌍변(四周雙邊)으로, 계선(界線)이 있으며, 상하이엽화문어미(上下二葉花紋魚尾)이다. 크기는30.6×20.7㎝, 반곽(半郭)의 크기는 19.8×16.1㎝이다. 1면 10행에 1행의 자수는 20자이다. 주(註)는 쌍행(雙行)이다. 원광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구성/내용]
문집 첫머리에 세계도와 목록이 있고, 서문은 없다. 권1은 시(詩), 권2는 서(書)·서(序)·기(記)·잡저(雜著)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권3은 부록으로 조이추의 전기 자료인 유사(遺事)·묘갈명·묘지명과 만장(輓章)·제문 및 서원 봉안 관련 글이 수록되어 있다. 또한 문집 끝에는 노상직(盧相稷)·조긍섭(曺兢燮) 등 인근의 저명한 학자가 쓴 발문이 붙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