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40046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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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大訥手卷 |
영어공식명칭 | Daenulsugwon |
분야 | 역사/근현대,문화유산/기록 유산 |
유형 | 문헌/전적 |
지역 | 경상남도 김해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구진성 |
[정의]
1913년에 편찬된 경상남도 김해 출신 유학자 노상익의 문집.
[저자]
노상익(盧相益)[1849~1941]의 자는 치삼(致三), 호는 대눌(大訥)·모헌(某軒)이며, 본관은 광주(光州)이다. 1849년 11월 김해시 생림면 금곡(金谷)에서 극재(克齋) 노필연(盧佖淵)과 모친 창녕 성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16세 때 동생 소눌(小訥) 노상직(盧相稷)과 아버지를 따라 김해부사였던 성재(性齋) 허전(許傳)을 만나 제자가 되었다. 1882년 문과 시험에서 차석을 차지하고, 사헌부지평 등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1894년 갑오개혁 이후 김해로 낙향하였다가 동생과 밀양으로 거주지를 옮겼다. 1905년 다시 벼슬이 내려와 조정에 나아갔다가, 느슨해진 국가 기강에 실망하고 낙향하였다.
1906년 2월 이토 히로부미[伊藤 博文]에 의해 위험 인물로 지목되어 밀양 영남루에 구금된 일이 있었고, 1910년 11월 일제의 은사금을 거부하였다가 다시 구금되었다. 일제의 감시를 피해 1911년 11월 망명길을 떠났고, 노상직과 압록강을 건너 안동현[단동]에 거주하였다. 이후 양자 노식용을 잃고, 1913년 1월 노상직은 고국으로 돌아갔다. 홀로 남은 노상익은 1913년 이승희(李承熙)가 주도하던 ‘동삼성(東三省) 한인공교회(韓人孔敎會)’에 참여하여 유교 개혁을 위해 활동하였다.
1914년에는 독립군 군자금 모집 관련 인물로 지목되면서 일제에 의해 더욱 엄중한 감시를 받았다. 몇 년 뒤 1919년 동생 노상직이 독립을 청원하는 파리장서에 서명한 사건이 발생하자, 망명지의 노상익에게도 가혹한 감시가 재개되었다. 1922년 군자금 모집과 관련한 인물로 다시 거론되면서 더 이상 망명 생활이 어려워지자 귀국하였다. 이후 김해 금곡에 천산재(天山齋)를 짓고 은거하다가 1941년 9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편찬/간행 경위]
필사로 소장하고 있던 노상익의 망명 전 작품들을 동생 노상직이 정리하여 1913년 5월 발문을 짓고 『대눌수권(大訥手卷)』을 편찬하였다.
[형태/서지]
8권 5책의 목판본으로, 오침안 선장본으로 되어 있다. 판식은 사주단변(四周單邊)으로, 계선(界線)이 있으며, 상하내향이엽화문어미(上下內向二葉花紋魚尾)이다. 반곽(半郭)의 크기는 20.1×16.2㎝이다. 1면 10행에 1행의 자수는 20자이다. 현재 부산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구성/내용]
1책에는 시(詩)가 수록되어 있고, 2책에는 1885년에 올린 상소문과 1905년에 홍문관시강을 사직하며 올린 상소문, 그리고 스승인 허전에게 질의한 것을 비롯해 교유한 인사들과 주고받은 편지글이 실려 있다. 3책에도 지인들과 주고받은 편지글이 있으며, 잡저(雜著) 분류의 「논어석인(論語釋人)」과 「논어석물(論語釋物)」 등의 작품이 실려 있다. 4책의 잡저에는 「사시제설집요(四時祭說輯要)」를 비롯하여 「좌우명」, 「장자식용명명설(長子寔容命名說)」, 「삼자명명설(三子命名說)」, 그밖에 1876년에 쓴 「자경문(自警文)」, 서(序), 기(記), 후지(後識), 발문 등이 수록되어 있다. 5책에는 축문, 제문, 비명, 구묘문(丘墓文), 행장, 가장, 그리고 노상직이 쓴 발문이 수록되어 있다.
[의의와 평가]
근대기에 김해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던 노상익의 사상과 활동을 깊이 들여다볼 수 있는 자료이다. 특히 노상익의 중국 망명 이전의 작품이 망라되어 있어, 망명 이후의 문집인 『대눌수권속편(大訥手卷續編)』과 비교하여 고찰함으로써 당대를 살던 유학 지식인들의 동향과 의식을 심층적으로 탐구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