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400466
한자 小訥先生文集
영어공식명칭 Sonulseonseang-munjip
이칭/별칭 『소눌집』
분야 역사/근현대,문화유산/기록 유산
유형 문헌/전적
지역 경상남도 김해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구진성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간행 시기/일시 1933년 11월 - 『소눌선생문집』 간행
소장처 국립중앙도서관 - 서울특별시 서초구 반포대로 201[반포동 산60-1]
소장처 고려대학교 도서관 - 서울특별시 성북구 안암로 145[안암동5가 1-2]
간행처 자암서당 - 경상남도 밀양시 단장면 무릉리
성격 시문집
저자 노상직
권책 48권 25책
행자 10행 20자
규격 28.1×20.1㎝|20.3×14.9㎝[반곽]
어미 상일엽화문어미(上一葉花紋魚尾)
권수제 소눌선생문집(小訥先生文集)
판심제 소눌선생문집(小訥先生文集)

[정의]

1933년 간행된 개항기 경상남도 김해 출신 유학자 노상직의 시문집.

[저자]

노상직(盧相稷)[1885~1931]의 자는 치팔(致八), 호는 소눌(小訥)·눌인(訥人)·자암병수(紫巖病叟) 등이며, 본관은 광주(光州)이다. 1855년 11월 21일 김해 생림면 금곡리에서 노필연(盧佖淵)과 창녕 성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작은 아버지 우당(愚堂) 노호연(盧滈淵)의 계후자(繼後者)가 되었다. 12세 때 아버지와 맏형 대눌(大訥) 노상익(盧相益)과 당시 김해부사로 부임하였던 성재(性齋) 허전(許傳)의 제자가 되었다.

1879년에는 선대가 거주하던 창녕 국동으로 이주하여 1883년부터는 추원재(追遠齋)에서 학생 30여 명을 모아 강학하였다. 부모상을 모두 마친 1888년에는 극기재(克己齋)에서 다시 강학하였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다시 김해로 돌아왔다가 이듬해 밀양으로 옮겨 금산서당(錦山書堂)을 세워 강학하였다. 1896년에는 밀양 노곡(蘆谷)에 자암초려(紫巖草廬)를 짓고 강학을 확대 시행하였다.

1911년 11월에 노상익이 일제의 감시를 피해 망명하자, 노상직도 가산을 정리하여 한 달 뒤에 가족들과 함께 형을 따라갔다. 1913년에 귀국하여 노상익의 문집 『대눌수권(大訥手卷)』을 간행하였고, 1914년에는 자암서당을 건립하여 다시 강학하면서 서적 간행 사업에도 힘을 기울였다. 1919년 조선의 독립을 청원하는 파리장서에 제자들과 함께 서명했다가 옥고를 치렀고, 다시 말방(秣方)으로 옮겨 사남서장(泗南書庄)에서 강학하였다. 1926년 자암서당을 수리하여 강학 활동을 지속하였고, 이후 아들 노가용(盧家容)을 따라 마산으로 옮겼다가 1931년 1월 22일 사망하였다.

[편찬/간행 경위]

저자가 사망한 1931년 8월 자암서당에서 문집 간행을 위한 모임을 하고, 본격적인 정리 작업을 시작하였다. 원고는 문체와 관계없이 저작 연대순으로 정리한 이후 문체별로 다시 분류하였다고 전한다. 50여 권 25책으로 정리되었다가, “정치(精緻)하지 못한 글을 후세에 전하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다.”라는 의견이 있어 또다시 산삭하고, 총독부의 검열을 거쳐 최종적으로 48권 24책에 목록 1책을 더하여 총 25책으로 간행하였다.

누락된 원고는 속집으로 간행하기 위해 7책의 초고가 정리되었으나, 간행되지 못하고 원고 상태로 부산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최종 원고가 완성되자, 1933년 3월 19일 자암서당에서 간행을 시작하여 11월 『소눌선생문집(小訥先生文集)』을 완간했는데, 당시의 일이 『간소일록(刊所日錄)』에 기록되어 있어 상황을 자세히 살필 수 있다. 『소눌집(小訥集)』이라고도 불린다.

[형태/서지]

48권 25책의 목판본이다. 판식은 사주쌍변(四周雙邊)이며, 상일엽화문어미(上一葉花紋魚尾)이다. 크기는 28.1×20.1㎝, 반곽(半郭)의 크기는 20.3×14.9㎝이다. 1면 10행에 1행의 자수는 20자이다. 권수제와 판심제는 ‘소눌선생문집(小訥先生文集)’으로 되어 있다. 주(註)는 단행(雙行)이다. 국립중앙도서관, 고려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구성/내용]

본집은 목록 3권에 원집 48권으로 총 25책으로 되어 있다. 권1에서 권4까지는 406제의 시(詩)이다. 권1은 26세부터 40대 초반까지 지은 시가 수록되어 있고, 권2는 50대 중반까지 지은 시로 상당수가 만시(挽詩)이며, 권3, 4에는 대체로 경술국치 이후의 시들로 판단된다. 권5~18은 1편의 소(疏)와 737편의 편지이다. 권19~24는 53편의 잡저(雜著)인데, 집안 자제들과 문하생들에게 학업과 행실에 관해 이야기한 글, 각종 예(禮)에 관해 고찰한 글, 역법에 관한 글 등 다양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권25, 26은 72편의 서(序)로 되어 있는데, 앞선 시대 유학자들의 문집 서문이 상당수를 차지한다.

권27~30은 140편의 기(記)인데, 대부분 누대·정자 등 건물에 관한 내용이다. 권31에는 42편의 발(跋)이 실려 있는데, 대체로 저자의 편저나 저자가 간행을 주도한 선현의 저서에 대한 것이다. 권32는 5편의 명(銘), 3편의 잠(箴), 15편의 상량문, 23편의 축문으로 되어 있다. 권33은 40편의 제문과 4편의 뇌사(誄詞)이고, 권34는 유허비·제단비 등 21편의 비문이 실려 있다. 권35에는 29편의 묘지명, 권36~41은 150편의 묘갈명, 권42에는 30편의 묘표(墓表)가 실려 있다. 권43~46은 46편의 행장인데, 특히 권43은 전체가 스승 허전의 행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권47은 연보인데, 전체가 허전의 연보이다. 권48은 13편의 유사(遺事), 7편의 전(傳)으로 되어 있다.

[의의와 평가]

노상직은 구한말에서 일제 강점기에 걸쳐 김해와 밀양 지역에서 활동했던 유학자로 현재 파악되는 제자의 숫자가 800명을 넘는다. 이러한 거대한 인적 네트워크의 중심에 노상직이 있고, 그들 간 인적 교류의 구체적 양상이 『소눌선생문집』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향후 시대사·유학사·인물사·교육사·생활사 등의 연구에 큰 자산이 될 자료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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