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40056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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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海 德山里 - 遺蹟 |
이칭/별칭 | 김해 덕산리 사지 유적,김해 덕산리 사지,김해 덕산리 절터 |
분야 | 종교/불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유적(일반) |
지역 | 경상남도 김해시 대동면 덕산리 산74 |
시대 | 고대/남북국 시대/통일 신라,고려/고려 전기,고려/고려 후기,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조원영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2002년 2월 14일~2002년 8월 12일 - 김해 덕산리 절터 유적 경남문화재연구원에서 발굴 조사 실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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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소재지 | 김해 덕산리 절터 유적 - 경상남도 김해시 대동면 덕산리 산74 |
출토 유물 소장처 | 국립김해박물관 - 경상남도 김해시 가야의길 190[구산동 232] |
성격 | 절터 |
[정의]
경상남도 김해시 대동면 덕산리에 있는 통일 신라 시대~조선 전기의 절터 유적.
[변천]
김해 덕산리 절터 유적은 남북국 시대~조선 시대 전기에 존속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출토 유물을 참고하면, 폐사 시기는 14세기 말이나 늦어도 15세기 중후반은 넘지 않았을 것이다.
[위치]
김해 덕산리 절터 유적은 김해시 대동면 덕산리 산74번지, 대구-부산 간 고속 도로 건설 구간 내[10공구]에 자리한 유적이다. 해발 130m의 각성산 남쪽 비탈에 있으며, 배후에 나루터를 끼고 있어 교통의 요지에 자리 잡고 있다. 유적이 있는 곳에서 낙동강(洛東江)을 따라 올라가면 원동을 거쳐 삼랑진, 창녕, 함안까지 갈 수 있으며, 낙동강을 따라 바다로 나가면 남해 연안으로 이어진다.
[발굴 조사 경위 및 결과]
2002년 2월 14일~동년 8월 12일 경남문화재연구원에서 발굴 조사를 실시하였다. 출토 유물과 층위로 보아 크게 두 문화층으로 나눌 수 있다. 상층은 고려 시대가 중심이며, 하층은 남북국 시대를 중심으로 한다. 상층의 유구는 건물의 기단으로 추정되는 석렬 2기, 건물에 부속되는 배수로 등이 있으며, 목주 열도 확인하였다. 그러나 유구가 거의 남아 있지 않아 출토 유물에만 의지하여 유적의 성격을 판단할 수밖에 없다. 유물로는 금동 여래 입상과 금동 보살 입상, 금동 경패, 금동 판불, 소조불 등 불교 미술품 외에 고려 시대 전 시기에 걸친 많은 양의 청자류와 기와가 출토되었다. 출토된 유물 가운데 시기를 알 수 있는 것이 불상과 토기, 기와, 그리고 자기 조각 등이다. 이 가운데 가장 많은 양을 차지하고 있는 기와는 막새류의 경우 통일기 후반~고려 시대 초기의 것으로, 평기와 가운데 나말 여초로 판단되는 종선문 계열의 문양과 쌍을 이룰 것으로 추정된다. 단독문의 고려 전기 기와는 드물고, 고려 중기 이후의 초화문(草花紋), 단독문에 횡대가 있는 형태, 복합문 기와는 많지만 고려 중기 이후의 막새인 일휘문은 전혀 출토되지 않아 건물의 존속 시기를 추정해 볼 수 있다. 또한 조선 시대의 대표적인 문양인 호상 집선문이 전혀 출토되지 않고, 15세기 초 기왓가마[와요]에서 다량 확인되는 직선계 사선 집선문이나 능형 집선문 등도 확인되지 않으므로 고려 말에서 멀지 않은 시점에는 폐사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불상이나 자기에서도 대체적인 시기를 가늠할 수 있다. 출토된 불상 가운데 금동 여래 입상과 금동 보살 입상은 남북국 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며, 금동 경패와 금동 판불은 고려 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토기는 주름무늬병을 중심으로 한 남북국 시대 토기와 고려 시대 초기의 해무리굽 청자에서부터 순청자, 상감 청자에 이르기까지 고려 시대 전 기간에 걸친 청자가 출토되고 있으나, 조선 시대의 분청사기는 그 양이 많지 않다. 분청사기 중에는 분청사기 인화승렴문 마상배가 있는데, 이 유물 또한 15세기 중후반은 넘지 않을 것으로 판단된다.
[현황]
김해 덕산리 절터 유적에서 출토된 유물은 현재 국립김해박물관에서 소장하여 관리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김해 덕산리 절터 유적은 지금까지 김해 지역에서 조사된 절터 가운데 가장 많은 양의 불교 유물이 출토된 유적으로, 출토 유물로 보아 대단히 높은 사격(寺格)을 유지한 사찰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