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4009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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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佛敎 |
영어공식명칭 | Buddhism |
분야 | 종교/불교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경상남도 김해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조원영 |
[정의]
고대부터 현대까지 경상남도 김해 지역에서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따라 수행하는 종교.
[개설]
김해 지역에는 가락국 수로왕과 허왕후, 거등왕, 장유화상이 창건했다는 문헌 기록과 연기설화가 전하는 사찰이 남아 있다. 또한, 남북국 시대 이후 고려 시대, 조선 시대까지 법등을 이었던 감로사지·덕산리사지·선지사지와 같은 절터와 불탑, 마애불이 산재하여 불교 사상과 문화가 융성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가야 시대의 김해 지역 불교]
김해 지역 불교의 시작은 가야 시대부터 라고 하지만 가야의 경우는 고구려, 백제, 신라처럼 나라에서 불교를 공인했다는 기록이 없다. 물론 『삼국유사』의 기록에서 가락국과 불교가 관련이 있다는 정황은 찾아볼 수 있지만, 구체적인 불교 수용의 모습을 확인하기는 어렵다. 삼국에 비해서 자료가 부족한 가야의 불교에 대해 그나마 『삼국유사』「가락국기」와 탑상(塔像)편의 금관성파사석탑, 어산불영조의 내용에서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또 김해 지역에 전승되는 설화를 통하여 가야 불교의 내용을 보다 더 다양하게 확장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찾을 수 있다. 가야 불교가 전래된 시기, 전래 국가, 전래된 불교의 성격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이 나오며 발전적인 논쟁이 전개되었다. 그렇지만 1차 사료인 『삼국사기』, 『삼국유사』를 중심으로 엄격한 사료 비판을 하면서 김해의 가야 불교를 확인하고자 하는 역사학계와 근대 및 현대의 전승자료와 사찰의 연기설화를 믿고 가야 불교의 실체를 증명하려는 김해 불교계와 향토사 연구자 간의 시각 차이가 워낙 커서 김해 지역의 가야 시대 불교의 면모를 파악하기에는 상당한 어려움이 있다.
[신라 말 고려 초의 김해 지역 불교]
가야 시대 이후 김해 지역 불교의 성격에 대해서는 신라 말의 역사 자료에서 찾아볼 수 있다. 신라 말에는 중앙의 지방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되면서 지방에서는 중앙 정권에서 떨어져 나온 귀족이나 지방의 세력가들이 불교 사원, 해외 무역, 군진 세력, 촌주의 지위 같은 것을 배경으로 호족으로 성장하여 반독립적인 세력으로 등장하였다. 김해 지역에도 호족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삼국유사』「가락국기」와 「봉림사진경대사보월능공탑비」에 당시 김해 지역을 관할하던 호족에 대한 단편적인 내용이 있다. 또한 그 호족들과 그들이 후원해주었던 나말여초의 불교 승려와의 관계도 파악할 수 있다.
「가락국기」에는 충지 장군이라는 인물이 등장하는데, 907년(효공왕 11) 당시에 김해 지역의 정권, 군권, 재정권을 망라한 최고 지배자인 소충자와 동일인으로 보인다. 소충자 이전 김해 지역에는 지김해부·진례성군사·명의장군이라는 직명을 가진 김인광이 있었다. 김인광은 소충자에 앞서 성장한 김해 지역 최초의 호족으로서 수로왕의 제사를 받들던 가야계 후손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인광은 이후 자신의 밑에서 활동하다가 김해 지역 최고 권력을 거머쥔 소충자·소율희 형제의 힘에 밀려 결국 역사 기록에서 사라지고 만다.
김인광, 소충자를 이어서 김해 지역의 실력자로 등장한 이는 소율희였다. 소율희는 소충자의 아우로서 907년에 영군(領軍)이란 지위에 있었으나, 4년이 지난 911년에는 김해부지군부사로서 실질적 통치권자의 위치에 있었다. 봉림사 진경대사 보월능공탑비에 지진례성제군사 김율희로 나타난다. 같은 시기에 하나의 지역을 장악한 인물이 두 사람일 수 없다는 상식적 판단에 입각해 보면 결국 ‘소율희’와 ‘김율희’는 동일인으로 보인다. 이들 호족은 김해 지역을 통치하는 동안에 구산선문 가운데 봉림산문의 진경심희, 사굴산문의 낭공행적, 수미산문의 진철이엄 선사 등을 후원하였다.
진경심희는 김유신의 후손으로 김해 지역에서 태어나 9세에 원감현욱에게 출가하여 승려가 된 인물이다. 출가 10년 만인 868년(경문왕 8) 스승의 심인(心印)을 전수받았다. 심희는 스승으로부터 인가를 받은 후 전국을 두루 돌면서 수행과 교화 활동을 펼쳤는데, 찬유(璨幽)와 같은 제자승(弟子僧)을 대동하여 돌아본 곳으로는 광주·설악·명주 등 당시 반신라(反新羅)의 정서가 팽배한 곳이 많았다. 심희가 창원 지역에 머물게 된 것은 20여 년 동안의 순례 행을 마친 이후의 일인데, 출신지인 김해와 가깝고 무엇보다 ‘복림(福林)’이라 불릴 만큼 길지(吉地)가 있었기 때문으로 이해된다. 심희는 여기서 많은 제자를 길러 산문을 발전시켰는데, 봉림사는 김해 지역과 창원 지역의 후원자들로부터 많은 지원을 받아 운영되었다.
이러한 기록을 통하여 나말여초 시기 김해 지역은 지방 호족이 적극적으로 후원한 선종 사상이 지역의 사상계를 주도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진경대사가 입적할 때 그의 제자가 500여 명이나 되었다는 것으로 볼 때 선불교가 김해 지역 일반민들에게 널리 퍼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불교 신앙적인 측면은 남아있는 기록 자료로서는 확인하기 어렵지만 김해 지역에 남아있는 불상을 살펴보면 아미타불, 석가모니불, 약사불 등 다양하여 현세구원적 성격을 띤 석가모니불신앙, 약사신앙과 함께 정토신앙인 아미타신앙도 유행했음을 엿볼 수 있다.
[고려 시대 김해 지역 불교]
고려 시대 김해 지역 불교계의 동향에 대한 전모를 파악하기는 어렵지만 문헌 기록과 발굴 조사 자료를 통해 일부나마 그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먼저 고려 초 창건된 장유사와 관련하여 『삼국유사』에는 장유사의 삼강(三剛)이 가야 시대에 세워진 왕후사가 장유사에서 가지고 있는 시지(柴地)의 동남쪽 끝에 있다고 해서 왕후사를 폐하고 전장(田莊)을 만들어 곡식을 저장하는 창고와 마굿간을 만들었다고 하였다. 장유사가 왕후사를 혁파했다는 내용을 보면 고려 시대 창건된 장유사가 왕후사보다도 김해에서 더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를 통해 장유사가 고려 초기 김해 지역의 중심 사원으로 자리 잡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감로사(甘露寺)는 『경상도속찬지리지』·『신증동국여지승람』·『김해부읍지』에 기록되어 있는데, 1237년(고종 24) 승려 해안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한다. 발굴 조사를 통해 보면 감로사가 남북국 시대부터 존재했던 사찰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1237년에 창건되었다는 표현을 쓴 것은 아마도 몽골군의 침입에 맞서 격렬하게 대몽항쟁을 하는 중에 김해의 군민들이 국가의 위기를 극복하고자 감로사를 중창했던 것으로 이해된다. 감로사는 대몽항쟁 이후 원종이 주지로 임명한 원감 충지가 부임하면서 번성하여 지역의 대표 사원으로 위상을 높이게 되었다. 이때 도반들이 운집하여 총림(叢林)을 이루어 법석(法席)이 울창하였다고 한다. 즉 김해를 비롯하여 인근의 많은 주민들이 감로사를 찾았을 것이다.
[조선 시대 김해 지역 불교]
고려 시대 번성했던 감로사는 1407년(태종 7) 12월에 자복사(資福寺)를 지정할 때 자은종(慈恩宗)에 소속되었다. 총 88개의 명찰(名刹) 가운데 문경 사자사, 하동 양경사 등과 함께 자은종 17개 사원 중 하나로 편성되었다. 당시 선정 기준이 고려 때 밀기(密記)에 기록된 비보사사(裨補寺社) 및 지방 각 고을의 답산기(踏山記)에 기록된 사찰이라고 하였으므로 사원은 해당 지방 군현과 긴밀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 감로사가 자복사로 지정된 것은 김해 지역 내 왕권의 지지 기반, 교단의 확산 거점, 지역민 결속의 구심점으로서 기능하였기 때문이다. 이를 고려한다면 조선 초기까지 지역 내에서 감로사의 위상은 상당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여러 문헌기록을 종합하여 조선 시대 김해 지역에서 불교 신행을 담당했던 사찰에 대해 살펴보면 16세기 경에는 금강사(金剛社)·감로사·구암사(龜巖寺)·십선사(十善寺)·청량사(淸涼寺)·이세사(離世寺)·운점사(雲岾寺)·진국사(鎭國寺)·명월사(明月寺) 등 9개소의 이름이 등장하였다. 그러나 18세기 중엽이 되면 감로사·임강사·구암사만 남아 있고, 나머지 사찰의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김해 지역 불교계의 변화를 보여주는 현상이라 할 수 있다.
[일제 강점기 김해 지역 불교]
일제 강점기 김해 지역에는 일본 불교 종파가 진출하였는데, 정토진종 본원사파, 정토종, 조동종, 대곡파 등이었다. 이들 종파는 식민지 조선에 개교를 추진한 대표적인 종파였으며, 김해 지역에도 마찬가지였다. 1910년대에 포교소가 개설되기 시작하여 1930년대 후반에는 그 숫자가 꽤 증가하였다. 일본 불교는 불교의 근대화가 이루어져 산중 불교가 아닌 도시 불교, 승려 중심이 아닌 대중 중심, 사원 중심이 아닌 사회 중심이라는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었고, 식민지 조선의 승려 뿐만 아니라 일반인에게도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왔다.
이 시기 김해 지역의 주요 사찰로는 은하사·해은사·성조암·장유암·흥부암·백룡암·모은암·백운암·영구암 등이 존재하였다. 이러한 사찰 가운데는 범어사의 말사가 많았다. 1920년대에 이르면 이와 같은 전통사찰에서 포교당을 설립하여 새로운 면모를 보여주었다. 즉 은하사가 동상동 포교당, 초선 포교당을 설립하여 산중 불교에서 탈피하여 적극적인 포교에 나섰다.
한편 1923년에는 김해불교협회가 창립되었는데, 회원이 200여 명이었으며, 김덕재·김두만·김중건·김용호 등이 중심이 되어 활동하였다. 이처럼 일제 강점기에 김해 지역의 불교는 일본 불교 종파에 맞서 새로운 변화를 준비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