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40058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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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海 良洞山城 |
영어공식명칭 | Gimhae Yangdong Mountain Fortress |
이칭/별칭 | 가곡산성(歌谷山城),내삼리산성(內三里山城),양동산성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터 |
지역 | 경상남도 김해시 주촌면 양동리 산39-1 |
시대 | 고대/삼국 시대/신라 |
집필자 | 안성현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1988년 - 김해 양동산성 동아대학교 박물관에서 지표 조사 실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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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지정 일시 | 1988년 12월 23일 - 김해 양동산성 경상남도 기념물 제91호 지정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2006년 - 김해 양동산성 경남문화재연구원에서 정밀 지표 조사 실시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2008년 - 김해 양동산성 동아세아문화재연구원에서 시굴 조사 실시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2017년 - 김해 양동산성 대성동박물관에서 발굴 조사 실시[2017]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2018년 - 김해 양동산성 대성동박물관에서 발굴 조사 실시[2018]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2021년 11월 19일 - 김해 양동산성 문화재청고시 제2021-141호에 따라 문화재 지정 번호 삭제 |
소재지 | 김해 양동산성 - 경상남도 김해시 주촌면 양동리 산39-1 |
출토 유물 소장처 | 국립김해박물관 - 경상남도 김해시 가야의길 190[구산동 232] |
성격 | 산성 |
소유자 | 산림청 |
관리자 | 김해시청 |
문화재 지정 번호 | 경상남도 기념물 |
[정의]
경상남도 김해시 주촌면 양동리에 있는 신라 시대 퇴뫼식 석축 산성.
[개설]
1988년 동아대학교 박물관에서 『문화유적분포지도』 제작을 위해 김해 양동산성(金海 良洞山城)에 대한 지표 조사를 실시하였고, 이후 2006년 ‘김해 양동산성 보수 정비 계획’에 따라 경남문화재연구원에서 정밀 지표 조사를 진행하였다. 2008년에는 동아세아문화재연구원에서 시굴 조사를 하였으며, 2010년에는 김해 양동산성 동문 터에 대한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다. 2017년과 2018년도에는 대성동고분박물관에서 집수지(集水地)에 대한 발굴 조사를 실시하였다.
조사 결과 북문 터와 동문 터, 남문 터, 집수지, 그리고 남쪽 성벽과 건물터 등이 확인되었다. 성벽과 집수지, 성문에 대한 조사를 통해 산성을 축조한 후 한 차례 혹은 그 이상의 수축(修築)이 이루어졌음이 밝혀졌다. 특히 산성 내부에서 기와가 출토되지 않았다는 점은 경상남도 지역의 다른 산성과 차이가 있다. 성벽은 바른 층 쌓기[외벽 면석 1개를 6개가 둘러싸게 축조하는 방법]를 하였다는 점에서 이 시기 신라의 석축 산성과 공통점이 있으나, 세부적으로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두께가 두꺼운 부정형 할석으로 쌓은 후 면석 사이의 빈틈은 잔돌을 끼워 견고성을 높였다. 이러한 축성법(築城法)은 경상남도 지역 신라 석축 산성 중 고식(古式)에 해당한다. 양동산성 내부 건물터 주변에서 기와가 거의 출토되지 않았으므로 건물터를 만드는 과정에서 중지되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삼국 시대에는 상당히 중요한 성곽이었으나, 신라가 가야를 복속한 이후에는 중요성이 줄어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양동산성’이라는 이름은 행정 구역과 관련이 있다. 조선 시대에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에 “가곡산성(歌谷山城)은 부의 서쪽 20리[7.85㎞]에 있다. 돌로 쌓았으며, 둘레가 600척[181.82m]이고 성안에 우물이 하나 있다. 지금은 못쓰게 되었는데, 요새지로 만들 만한 곳이다”라고 기술되어 있다. 다른 기록에서도 비슷한 내용을 전하고 있다. 따라서 초축 당시 양동산성의 이름은 알 수 없으나 늦어도 조선 후기에는 가곡산성으로 불렸음이 분명하다.
[건립 경위]
김해 양동산성은 퇴뫼식 석축 산성으로, 6세기 중반 신라가 축조하였다.
[위치]
김해 양동산성은 김해시 주촌면 양동리 산39-1번지 일대의 산 정상부에 축조되었다. 산성에서 고 김해만(古 金海彎)과 낙동강(洛東江) 하구, 김해 분산성(金海 盆山城) 및 김해 시가지가 조망되며, 남쪽으로는 김해시 장유동이, 남동쪽으로는 김해 천곡성(金海 泉谷城)이 바라다보인다. 특히 산성에서는 남동쪽과 북서쪽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데, 북쪽은 황새봉[392m], 동쪽은 경운산[378.7m], 서쪽은 매봉산[338m] 등으로 둘러싸여 있다.
[형태]
길이는 860m이다. 남쪽 성벽은 20㎝~40㎝의 장방형 할석을 사용하여 바른 층 쌓기를 하였다. 층간의 열을 맞추기 위해 ‘2열 수평 줄눈 쌓기[두꺼운 돌과 연결되는 부분에 얇은 돌 2단을 쌓아 수평을 맞추는 방법]’한 부분이 관찰된다. 석재 사이의 빈틈은 잔돌을 끼워 견고성을 높였다. 외벽 기저부에는 성벽의 붕괴를 방지하기 위해 기단 보축(補築)[붕괴되지 않도록 외벽에 덧대어 쌓은 석축]을 설치하였다. 보축의 단면 형태는 삼각형으로, 판석에 가까운 부정형 석재와 할석을 이용하여 높이 6단~7단, 60㎝~80㎝로 설치하였으며, 외부는 흙으로 다져서 보강하였다. 내벽은 외벽보다 축조 수법이 조잡하며, 높이는 14단 250㎝ 정도이다. 남벽 중앙에 해당하는 계곡부에서는 2개소의 출수구가 조사되었다. 수구(水口)[성 내부에 모인 물을 성벽으로 배출하는 배수구] 간의 거리는 980㎝가량이다. 출수구는 가공한 석재를 사용하였고, 입면 형태는 삼각형이다.
성문은 현문식(懸門式)[성벽의 일정 높이에 사다리를 놓고 통행하는 형태] 구조인데, 삼국 시대 신라의 석축 산성과 동일하다. 하지만 성벽의 바깥쪽 모서리를 호형(弧形)과 유선형(流線型)으로 쌓은 점은 신라 석축 산성에서는 보기 어려운 구조이다. 집수지는 성내 남쪽 계곡의 중앙에 위치하며, 평면 형태는 장방형, 단면은 3단의 계단식으로 쌓은 독특한 형태이다. 규모는 최상단 길이 20m, 너비 12.2m, 최대 깊이 약 3.4m로 대형에 속한다. 호안 석축(護岸 石築)[물을 가두는 집수지 가장자리에 돌로 쌓은 석축]의 축조 수법은 바른 층 쌓기와 허튼층쌓기가 모두 확인되므로 한 차례 수축이 이루어졌음을 시사한다. 특히 허튼층쌓기를 한 호안은 보축한 부분에서 주로 나타난다. 바닥에는 판석을 깔아서 마무리하였다.
한편, 지표 조사에서 건물터는 15동이 확인되었다. 건물터는 남동쪽 모서리 부분의 평탄한 대지에 11동이 위치하는데, 성벽의 진행 방향과 평행한 것과 서쪽으로 8m 정도 떨어진 것으로 나누어진다. 성벽과 평행한 것들은 초석식(礎石式) 건물로 규모는 600㎝~800㎝이며, 정면 4칸, 측면 3칸이다. 건물터 중에는 초석[건물의 기초를 튼튼히 하기 위하여 기둥 밑에 괴는 돌]이 엎어진 채로 놓인 것도 있다. 유물은 초기 철기 시대의 토기 조각과 삼국 시대의 토기 조각, 그리고 조선 시대의 자기 조각이 출토되었다. 산성의 초축과 관련한 것은 삼국 시대의 토기 조각으로 대체로 6세기에 해당하지만, 집수지에서 출토된 평행문·승문이 시문된 타날문[눌러 찍은 무늬] 항아리 조각은 6세기 이전으로 편년이 가능하다. 통일 신라 시대의 기와가 거의 출토되지 않은 점이 특이하다.
[현황]
김해 양동산성은 1988년 12월 23일 경상남도 기념물 제91호로 지정되었다.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고시 제2021-141호 「문화재 지정[등록]번호 삭제 및 문화재명 표기 방식 변경 고시」에 따라 문화재 지정 번호는 삭제되었다. 소유자는 산림청이고, 관리자는 김해시청이다. 출토 유물은 국립김해박물관에서 소장하여 관리하고 있다. 일부 구간의 성벽은 복원이 이루어졌으나, 나머지는 성벽은 붕괴된 상태로 관리되고 있다. 일부에서는 무너진 석재 사이로 내벽이 보인다. 성내에는 소나무와 잡목이 우거져 있으며, 집수지에는 잡초가 자라고 있다. 성 내부로 진입하는 인도가 조성되어 있으므로, 추가 발굴 조사도 중요하지만 고고학적 조사 이전에 정비 작업을 진행하는 것이 타당하다.
[의의와 평가]
김해 양동산성은 신라가 낙동강 서쪽 기슭으로 진출한 후 쌓은 초기 산성 중 하나이며, 시기는 6세기 중반에 해당한다. 성문의 모서리를 호형과 유선형으로 축조하였다는 점에서, 경상남도 지역 신라 산성의 축성술과 백제 석축 산성의 축성술을 비교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