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40068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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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裵德民 |
분야 | 종교/유교,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효자·열녀 |
지역 | 경상남도 김해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유영옥 |
몰년 시기/일시 | 1592년 - 배덕민 사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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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 시기/일시 | 1979년 3월 - 배덕민 충효각 재건 |
거주|이주지 | 거주지 - 경상남도 김해시 |
묘소|단소 | 배덕민 묘소 - 경상남도 김해시 흥동 |
사당|배향지 | 침천재 - 부산광역시 강서구 죽동동 303 |
성격 | 효자 |
성별 | 남 |
본관 | 분성 |
[정의]
조선 전기 경상남도 김해 지역에 거주한 효자.
[가계]
배덕민(裵德民)[?~1592]의 본관은 분성이며, 시조 배원룡(裵元龍)의 14세손이다. 아버지는 배지상(裵智祥)이다. 아들로 배영채(裵永採)와 배영록(裵永祿)을 두었다.
[활동 사항]
배덕민은 품행이 단정하고 순수하였으며, 효성이 지극하였다고 한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였을 때 아버지가 병들고 노쇠하여 걷지 못하자, 아버지를 업고 지금의 경상남도 김해시 생림면 나전리 산골로 숨어들어 정성껏 봉양하였다. 얼마 후 왜적이 나타나 위협하며 항복을 강요하자, 아버지가 “이 나라 조선의 백성으로서 어찌 개돼지와 같은 너희들을 따르겠는가”라고 꾸짖었다. 왜적이 아버지를 해치려 달려들었는데, 마침 배덕민이 나무하러 나갔다가 돌아왔다. 배덕민이 크게 통곡하면서 맨주먹으로 왜적을 밀쳐내며 아버지를 감싸안고 칼날을 대신 맞았으나, 배덕민과 아버지 모두 사망하였다. 왜적이 “아버지는 능히 충성하고 자식은 능히 효도하니 참으로 동방의 귀감이다”라고 하며 감탄하고는 표석(表石)을 세워주고 물러갔다.
이탁영(李擢英)[1541~1610]이 임진왜란의 전쟁 상황을 기록한 『효사재정만록(孝思齋征蠻錄)』에도 배덕민의 이야기가 나온다. 1592년 6월 27일 기록에 “지금 사로잡혔다가 생환한 김해 사람을 통해 들으니, 배덕민 일가가 모조리 죽임을 당하였다고 한다. 배덕민은 온화하고 공손하며 신의가 있고, 하늘이 낸 지극히 효성스런 인물로, 내 벗 배지상의 아들이다. 배지상도 목이 베었다고 하니 더더욱 통탄스럽다”라고 하였다.
[묘소]
배덕민의 무덤은 경상남도 김해시 흥동에 있다.
[상훈과 추모]
배덕민 사후 정려가 내려졌으며, 조봉대부 동몽교관을 증직받았다. 정려가 내려졌을 때 흥동에 충효각을 세웠는데, 세월이 오래되어 무너졌다. 이후 후손들이 1979년 3월 지금의 부산광역시 강서구 죽동동 침천재에 재건하였다. 매년 음력 10월 첫째 일요일에 배지상과 배덕민 부자를 향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