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40068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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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性伊 |
이칭/별칭 | 배성이(裵性伊) |
분야 | 종교/유교,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효자·열녀 |
지역 | 경상남도 김해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유영옥 |
[정의]
조선 전기 경상남도 김해 지역에 거주한 열녀.
[가계]
성이(性伊)의 아버지는 호장(戶長) 배수의(裵守義)이고, 남편은 김해부 향리 허후동(許厚同)이다.
[활동 사항]
성이는 조선 성종 때의 열녀로, 『성종실록』과 『신증동국여지승람』 및 김해 지역 여러 읍지류에 열행이 수록되었다. 『성종실록』은 성이의 열행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성이는 21세에 허후동에게 시집갔는데, 두 달 만에 허후동이 익사하였다. 피눈물로 3년을 보내면서 남편의 호패로 신주를 만들어 신(神)을 의지하게 하고서 초하루와 보름에 반드시 제사를 지냈다. 자신이 직접 베를 짜 매번 남편의 기일 때마다 옷을 지어 제사 지내고, 제사를 마치면 불살랐다. 남편이 죽은 지 20여 년 동안 고기를 먹지 않고 매운 채소를 먹지 않는 등 지조가 조금도 해이해지지 않았다. 부모가 일찍이 과부된 성이를 걱정하여 그 뜻을 빼앗고자 하니, 딸이 “제가 항상 칼을 차고 끈을 휴대하고 있는데,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만일 저의 뜻을 뺏고자 하신다면 이것으로 자진하려는 것입니다”라고 하기에, 부모가 두려워서 그만두었다. 시부모를 효성으로 섬기며 정성과 공경을 다하였고, 예(禮)로 스스로를 처신하며 일찍이 발이 울타리 밖을 나간 적이 없다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성종실록』과 약간 다른 이야기가 전한다. 우선 20세에 남편이 죽었다고 되어 있고, 초상 때 음식을 지극히 정결하게 올리고자 별도로 솥과 도마를 두었다는 내용이 추가되었다. 또 칼과 끈을 휴대한 이유도 약간 다르게 기술되었는데, 항상 강포한 자에게 절개를 잃을까 두려워 스스로 칼과 끈으로 경계하였다고 되어 있다. 김해 읍지류를 비롯하여 기대승의 『고봉집』, 윤근수의 『월정집』, 유형원의 『동국여지지』, 오횡묵의 『여재촬요』 등 성이의 열행을 기록한 여러 문헌은 모두 『성종실록』보다는 『신증동국여지승람』의 내용을 채택하였다.
[상훈과 추모]
성이는 1494년(성종 25) 5월 19일 정려문과 복호(復戶)[효자나 열녀 등에게 조세를 면제하여 주던 일]의 은전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