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상진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400691
한자 宋相振
영어공식명칭 Song Sangjin
이칭/별칭 송세완(宋世完),송세희(宋世禧)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남도 김해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인덕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87년 10월 11일연표보기 - 송상진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19년 4월 2일 - 송상진 김해장터 만세 시위 주도
활동 시기/일시 1919년 5월 30일 - 송상진 대구복심법원 징역 8개월 선고
몰년 시기/일시 1967년 6월 28일연표보기 - 송상진 사망
추모 시기/일시 2002년연표보기 - 송상진 대통령표창 추서
출생지 경상남도 김해시 진례면 담안리 지도보기
활동지 김해장터 - 경상남도 김해시 구지로180번길 31-4[동상동 910]지도보기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정의]

일제 강점기 경상남도 김해 출신의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송상진(宋相振)[1887~1967]은 1887년 10월 11일 지금의 경상남도 김해시 진례면 담안리에서 태어났다. 호적상의 본명은 송세완(宋世完)이고, 이명은 송세희(宋世禧)이다. 1919년 4월 2일에 있었던 김해장터 만세 시위의 주도자 중 한 사람이다. 송상진은 거사 당일 송세탁·허병 등의 주도자들과 함께 사람이 가장 많은 오후 4시경에 김해장터로 나갔다. 최계우가 허병이 제작한 태극기를 군중에게 배부하였고, 송상진·송세탁·허병·최계우·조병중·최덕관·김석암·박덕수 등은 군중 앞에 나서서 크게 대한 독립 만세를 부르며 만세 시위를 선도하였다. 이에 장꾼들이 열렬하게 호응하여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 만세를 소리 높이 외쳤다.

그 시각 읍내를 순찰하던 김해헌병분견소의 오오노 하츠타로[大野初太郞]가 시장통 네거리에서 사람들이 독립 만세를 부르며 남문을 향하여 간다는 말을 듣고 달려가 시위대를 이끌고 있던 송상진을 체포하였다. 시위대와 헌병 사이에 충돌이 벌어졌는데, 송세탁은 일본 헌병의 총검에 머리에 자상을 입었다.

송상진은 1919년 5월 3일 부산지방법원 재판에서 동지들이 징역 5월에 집행 유예 2년을 선고받았던 것과 달리, “범죄의 증빙이 불충분하다”라는 이유로 무죄를 선고받았다. 그러나 원심 검사가 판결에 불복하여 다시 공소를 제기하였고, 1919년 5월 3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이 취소되면서 다른 주도자들과 마찬가지로 징역 8월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송상진은 부산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고, 출옥 후에는 농사를 지으며 생활하였는데, 고문 후유증으로 고생하였다. 해방 이후 진례면 건국준비위원장을 맡았으며, 1967년 6월 28일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송상진은 200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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