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4007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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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盧百容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남도 김해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배병욱 |
출생 시기/일시 | 1885년 10월 16일 - 노백용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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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 시기/일시 | 1908년 - 노백용 한성사범학교 졸업 |
활동 시기/일시 | 1908년 - 노백용 밀양공립보통학교 교사 부임 |
활동 시기/일시 | 1912년 - 노백용 김해공립보통학교 교사 부임 |
활동 시기/일시 | 1921년 - 노백용 김해청년회 회장 취임 |
활동 시기/일시 | 1924년 - 노백용 합성학교 교사 부임 |
활동 시기/일시 | 1928년 2월 - 노백용 체포 |
활동 시기/일시 | 1930년 - 노백용 신간회 김해 지역 대표회원 후보 선출 |
활동 시기/일시 | 1931년 2월 25일 - 노백용 대구복심법원 징역 1년 6개월 선고 |
활동 시기/일시 | 1945년 8월 - 노백용 조선건국준비위원회 경남지부 위원장 취임 |
활동 시기/일시 | 1947년 - 노백용 민주주의민족전선 부산시위원회 위원장 취임 |
활동 시기/일시 | 1949년 - 노백용 국민보도연맹 경남도연맹 간사장 취임 |
몰년 시기/일시 | 1961년 8월 13일 - 노백용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2008년 - 노백용 건국포장 추서 |
출생지 | 경상남도 김해시 회현동 |
학교|수학지 | 한성사범학교 - 서울특별시 |
활동지 | 밀양공립보통학교 - 경상남도 밀양시 |
활동지 | 김해공립보통학교 - 경상남도 김해시 호계로500번길 15-15[동상동 534] |
활동지 | 합성학교 - 경상남도 김해시 가락로 111-12[서상동 172]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조선건국준비위원회 경남지부 위원장 |
[정의]
일제 강점기 경상남도 김해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노백용(盧百容)[1885~1961]은 1885년 10월 16일 지금의 경상남도 김해시 회현동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광주(光州)이고, 아버지는 노상욱(盧相旭)이다. 광주 노씨는 옛 생림면 금곡리와 나전리 일대에 세거한 김해의 대표적 재지 사족으로, 허전(許傳)[1797~1886]의 학통을 계승하면서 신문물의 수용에도 적극 관심을 보였다. 노백용의 큰아버지 노상열(盧相說)은 탁지부의 징세서장을 역임하였고, 대한자강회 김해지회에서 활동하였다. 아버지 노상욱은 가문에서 설립한 근대학교 조양의숙(朝陽義塾)의 숙감을 지냈다. 아들인 노재갑(盧在甲)은 해방 후에 김해군 인민위원장을 역임하였고, 딸 노남교(盧南橋)는 부녀동맹 경남도지부 간부를 지냈다.
[활동 사항]
노백용은 1908년 관립 한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1908년 밀양공립보통학교[현 밀양초등학교], 1912년 김해공립보통학교[현 김해동광초등학교], 1924년 사립 합성학교[현 김해합성초등학교]에서 교원으로 근무하였다. 3·1운동 이후 김해청년회 회장[1921] 등을 맡아 청년 운동을 주도하였고, 사회주의가 본격적으로 수용·확산되자 사회주의 운동에 적극 가담하였다.
1923년 김해의 사상 단체인 제4회(第四會) 결성에 참여하였고, 1920년대 중반부터는 북풍회와 북성회에서도 활동하였다. 1924년부터 조선일보 김해지국 기자를 지냈다. 1926년 조선공산당 제2차 대회에 경상남도 대표로 참석하였고, 1927년 제3차 조선공산당 경상남북도 책임자[도책]로도 활동하였다. 1928년 2월 제3차조선공산당사건 관련으로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약 20개월간 옥고를 치르고 면소 처분을 받았다.
1930년에는 신간회 김해 지역 대표회원 후보로 선출되었고, 신간회 중앙검사위원 등으로 계속 활동하였다. 1930년 11월 독립 자금 모집 사건인 통의부사건으로 다시 기소되었다. 1931년 2월 25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 6월 형을 선고받고 고등법원에 상고하였으나, 1931년 4월 27일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1932년 10월 19일 출소하였다.
해방 후에 조선건국준비위원회 경남지부 위원장과 경상남도 인민위원회 부위원장을 맡았고, 1947년에는 민주주의민족전선 부산시위원회 위원장을 지냈다. 그러나 정부 수립 후에는 전향하여 1949년 국민보도연맹 경남도연맹 간사장으로 활동하였다. 6·25전쟁 발발 직후 방첩대에 체포되어 김정한(金廷漢)과 함께 부산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김정한은 1945년 조선건국준비위원회 경남지부 문화부원으로 활동하며 노백용과 알게 된 사이이다. 다행히 방첩대원 중에 김정한의 제자가 있어 학살 직전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김정한은 1946년 3월 『전선』 창간호에 「옥중회갑」이란 단편 소설을 썼는데, 주인공의 모델이 노백용이다. 노백용은 석방 이후 자택에서 은거하며 살다가 1961년 8월 13일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노백용은 2008년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