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400751 |
---|---|
한자 | 李普林 |
영어공식명칭 | Lee Borim |
이칭/별칭 | 월헌(月軒)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경상남도 김해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엄경흠 |
출생 시기/일시 | 1903년 - 이보림 출생 |
---|---|
몰년 시기/일시 | 1972년 - 이보림 사망 |
출생지 | 경상남도 김해시 관동동 덕정마을 |
묘소|단소 | 이보림 묘소 - 경상남도 김해시 관동동 반룡산 |
사당|배향지 | 월봉서원 - 경상남도 김해시 덕정로77번길 11-12[관동동 555] |
성격 | 학자 |
성별 | 남 |
본관 | 전주 |
[정의]
일제 강점기 경상남도 김해 출신의 유학자.
[가계]
이보림(李普林)[1903~1972]은 1903년 지금의 경상남도 김해시 관동동 덕정마을에서 태어났다. 호는 월헌(月軒)이다. 중종의 다섯째 아들 덕양군(德陽君) 이기(李岐)의 후손으로, 할아버지는 이경현(李慶鉉), 아버지는 이승기(李承驥)이다. 아들은 이우섭(李雨燮)이다.
[활동 사항]
이보림은 어린 시절부터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가학을 이어받았다. 1920년 계화도에 은거하여 강학하고 있던 전우(田愚)[1841~1922]를 찾아가 문도가 되었다. 전우 문하에서 서진영(徐震英), 권순명(權純命), 유영선(柳永善) 등과 함께 학문을 닦았으며, 1922년 전우가 사망하자 변산의 진계정사(眞溪精舍)로 가서 서진영에게 배웠다. 서진영 사후에는 오진영(吳震泳)이 있던 음성 망화재(望華齋)로 가서 학문을 닦았다.
일제가 압제를 가속화하자 이보림은 “수사선도(守死善道)[죽을 때까지 옳은 도를 지키다] 넉 자 부적을 이마에 붙여 두어야겠다”라고 하고, 서재를 열어 원근의 학도를 모아 가르쳤다. 1945년 아버지가 사망하고 3개월 뒤에 해방을 맞았는데, “내가 죽은 뒤에 세상이 바뀌거든 나에게 그 사유를 고하여 구천의 한을 위로하라”라는 유언에 따라 고하여 올렸다. 해방 후 윤리를 제대로 세우고 후학을 가르치는 일에 종사하다가 1972년 사망하였다.
[학문과 저술]
이보림은 문집으로 『월헌집』을 남겼다.
[묘소]
[상훈과 추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