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4009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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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儒敎 |
영어공식명칭 | Confucianism |
이칭/별칭 | 유학 |
분야 | 종교/유교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경상남도 김해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정석태 |
[정의]
경상남도 김해 지역에서 공자의 사상과 관련된 학문과 의례 및 활동.
[개설]
고려 시대 이전까지 김해 지역의 유교는 자료의 부재로 알 수 없다. 조선 전기에는 충절과 퇴은(退隱)을 포함한 산림처사의 실천적 학문을 주 내용으로 하는 유교가 발전하였고, 후기에는 신산서원을 중심으로 남명학파의 실천적 학문과 퇴계학파의 이론적 학문을 결합한 유교가 발전하였다. 근대 이후에는 교육 구국의 기치 아래 교육한 자암서당(紫巖書堂)과 전통 문화 보존에 힘쓴 월봉서원(月峯書院) 등을 통해 면면히 계승되었다. 자암서당은 파리장서에 서명하고 독립운동에 헌신한 인물을 다수 배출하였고, 월봉서원은 남명학파와 퇴계학파의 학문만 존재하던 지역에 기호학파의 학문을 보태 김해 유교의 내용을 다채롭게 하였다.
[신라와 고려 시대 김해의 유교]
김해는 가락국의 옛 수도로 신라에 통합된 이후 금관소경·김해소경 등으로 그 본래의 면모를 유지하였고, 고려 시대에는 김해부·금녕도호부·금주목 등으로 변화하면서 대도회로 발전하였다. 따라서 신라 시대 이후 대도회에 상응하게 유교의 수준도 세련되었을 것이다. 고려 시대에는 1003년 목종 때 향학이 설립되고, 1127년 인종 때 향교가 설립되면서 유교가 크게 발전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남명 조식과 조선 전기 김해의 유교]
조선 전기 김해 지역에는 고려 후기 이래 존속하던 향교를 토대로 김해향교가 설립되었다. 도호부에 어울리는 규모와 넉넉한 재정을 갖추고 교육하는 한편, 향약 시행을 통해 지역민을 교화하였다. 이처럼 향교를 중심으로 김해 유교가 발전하는 데 김해 김씨를 위시한 지역 유력 사족 가문의 역할이 컸다. 그중 김해 김씨 김계금(金係錦)과 김계금의 삼종제 김계희(金係熙)는 김해에 충절과 퇴은의 중요성을 깊이 각인시켰다. 김계금은 사육신 사건으로 많은 사림이 희생되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해 단종에 대한 충절과 의리를 지켰고, 김계희는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검열을 거쳐 한성부윤을 역임한 후 벼슬에서 물러나 화포천 가에 정자를 짓고 한가롭게 지내는 고상한 풍도를 보였다.
김해 김씨 출신으로 김해 유교 발전에 깊은 영향을 미친 또 다른 두 사람은 김일손과 김일손의 장조카 김대유(金大有)이다. 비록 청도에 거주했지만, 여전히 김해에 토지 기반을 가지고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김일손을 통해 길재(吉再), 김종직(金宗直)으로 이어지는 사림파의 학문과 의리 사상이 일찍부터 김해에 전파되고 뿌리내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김대유는 현량과에 급제하여 벼슬하다가 기묘사화로 현량과가 혁파되자, 관직과 급제가 삭탈된 뒤 청도에 은거했다. 조식(曺植)을 위시한 경상우도에 널리 퍼져 있던 산림처사들의 정신적 지주였다. 조식과 망년의 벗으로 조식의 사상 형성과 김해 지역 남명학파 전개에 큰 영향을 미쳤다.
조식의 사상 형성과 김해 지역 남명학파의 전개에 깊은 영향을 미친 또 한 사람은 밀양에 은거했던 신계성(申季誠)이다. 신계성은 평생 벼슬하지 않고 학덕을 닦은 포의(布衣)의 처사였다. 조식은 신계성의 묘갈명에서 자신을 위시한 산림처사 중 최고이자 공자의 경지에 다가선 인물로 높이 칭송하였다. 조식은 일찍이 신계성을 스승으로 모시고 학문을 닦았다고 알려져 있다.
[신산서원과 조선 후기 김해의 유교]
조선 후기 김해 유교의 중심지는 신산서원이다. 신산서원은 1588년 조식의 중장년 강학지 산해정(山海亭)을 모체로, 산림처사로서 실천궁행하는 조식의 도학 정신을 구현할 터전으로 창건되었다. 임진왜란으로 신산서원과 산해정이 모두 소실되자, 1609년 산해정의 옛터에 중건되고, 같은 해 조식의 만년 강학지 두 곳에 창건된 덕천서원(德川書院)·용암서원(龍巖書院)과 함께 사액을 받아 명실상부하게 경상우도 남명학파 3대 본산의 하나가 되었다. 1616년 신계성을 함께 제향하였다.
신산서원은 초기 정인홍(鄭仁弘)의 제자를 중심으로 설립과 중건이 추진되고, 또 사액이 이루어지면서 정인홍의 영향력이 지대하였다. 1610년 조식의 위패를 봉안하고, 1616년 신계성의 위패를 봉안하면서 서원에 적을 둔 유생만 70여 명에 이르고, 김해뿐만 아니라 경상도 강우(江右) 지역[낙동강을 경계로 한 경상도 서부 지역]에 두루 걸치는 큰 서원으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1623년 인조반정으로 북인 정권이 무너지고 정인홍이 사사되면서 그 정치적·경제적 기반이 축소되고, 나아가 학문적 기반도 함께 축소되었다. 그 후 창녕 조씨·청주 송씨·김해 허씨 등 지역 유력 사족 가문이 향사와 강학을 주도하게 되자, 그 가문의 학문적 경향에 따라 이현일(李玄逸)에서 이상정(李象靖)으로 이어지는 영남 퇴계학파의 서원, 조식의 정신과 이황의 학문을 결합한 서원으로 발전하였다.
1866년 근기남인(近畿南人)의 종장 허전(許傳)이 김해부사로 원장을 맡으면서 영남 퇴계학파의 학문과 근기남인의 학문을 결합한 서원이 되었다. 하지만 근기남인의 비조인 정구(鄭逑)로 거슬러 올라가 퇴계학파의 이론적 학풍과 남명학파의 실천적 지향이 조화롭게 통합된 서원으로 새롭게 발전할 계기를 마련했지만 뒤이은 훼철로 좌절되었다.
[근대 이후 서당교육과 김해의 유교]
김해 유교와 깊은 관련이 있는 곳으로는 1983년 창건된 월봉서원이 있는데, 이보림(李普林)을 제향하는 곳이다. 이보림은 기호학파의 전우(田愚)와 오진영(吳震泳)의 문인으로 평생 이이(李珥)와 송시열(宋時烈)의 학문 종지를 굳건히 지켰다. 존화양이(尊華攘夷)의 정신으로 일제 강점기 내내 서당을 열어 후진을 교육하는 한편, 전래의 의관과 상투를 고수하며 왜색으로 흐르는 현실을 비판하였다. 월봉서원은 남명학파와 퇴계학파의 학문만 존재했던 지역에 기호학파의 학문을 보태 김해 유교의 내용을 다채롭게 하였다.
근대 김해 지역에는 서당 교육이 성행하였는데, 그중 노상직(盧相稷)의 자암서당이 가장 돋보인다. 노상직은 김해 지역에 면면히 계승되어 오던 신산서원의 강학 정신과 허전의 강학 정신을 근대 망국의 현실에서 되살려내었다. 비록 자암서당이 김해가 아닌 밀양에 있었지만, 자암서당의 교육이 신산서원과 허전의 강학 정신을 계승한 것임으로 김해 유교의 일부가 아닐 수 없다. 다수의 김해 선비들이 자암서당에서 학문을 익혔으며, 교육 구국의 기치 아래 행한 교육으로 파리장서에 서명하고, 독립운동에 헌신한 인물들이 많이 배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