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40096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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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天主敎 |
영어공식명칭 | Roman Catholic |
이칭/별칭 | 로마 가톨릭,가톨릭 |
분야 | 종교/기독교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경상남도 김해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한건 |
[정의]
경상남도 김해 지역에서 활동하는 로마 가톨릭 교회 소속의 그리스도교파의 하나.
[개설]
한국에는 17세기 초 북경으로 갔던 사절단이 한문 서학서를 도입하면서 천주교가 알려졌다. 18세기 후반 남인 학자들이 주어사(走魚寺)나 천진암 등에 모여 한문 서학서를 탐구하고 나서 신앙 실천으로 나아갔다. 1784년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귀국한 이승훈[세례명 베드로]이 이벽의 집에서 이벽[세례자 요한],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정약용[요한] 등에게 세례를 주면서 한국 천주교회 공동체가 시작되었다.
경상남도에서 처음으로 천주교가 전래된 것은 1785년 밀양 단장으로 유배 온 김범우[토마스]에 의해서이다. 김범우는 유배지에서도 마을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다가 고문과 형벌의 후유증으로 1년 만에 죽었다. 1790년 언양 길천 지역의 성처인, 언양의 향리인 오한우와 김교희 등이 복음을 전하였다고 전해진다. 언양 지역에서 신자들이 늘어난 것은 1815년 경상북도 안동 지역의 박해, 1827년 전라도 곡성 지역의 박해로 신자들이 피난하여 이주했기 때문이다. 1849년 귀국한 최양업 신부가 1850년 사목 방문으로 경상도 지역까지 오면서 신앙 공동체는 더욱 활기를 띠었다.
[김해 지역 천주교 전래]
김해 지역에 언제부터 천주교가 전래되었는지 정확하지는 않다. 학술적으로 뒷받침이 되지는 않지만 몇 가지 주장이 있다. 첫째로는 1801년 신유박해로 인해 사학 죄인으로 김해 삼방동으로 유배 와서 1824년까지 살았던 이학규(李學逵)를 통해서 천주교가 전래되었다고 보는 견해이다. 둘째로는 언제부터 신앙을 받아들였지는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한림면 장방리의 서응권(徐應權)[요한] 가족의 신앙 생활을 했었다는 증거를 통해 복음의 전래를 추정한다. 셋째로는 진례면 시례리에서 신앙생활을 하다가 1868년 순교한 박대식(朴大植)[빅토리노]과 가족들의 신앙생활을 증거로 복음의 전래를 추정한다. 이러한 사실들로부터 추정해 보면, 이학규가 김해 지역으로 유배 온 후부터 이학규와 교류했던 사람들이 자신의 마을에 천주교를 전파했던 것 같다.
[김해 지역 첫 본당 진영성당 설립]
1890년 죠조 신부가 영도 청학도에 부임하면서 부산성당이 설립되고, 김해 지역의 노루목공소가 포함되었다. 이후 1899년에는 봉림공소, 모산공소, 명호공소가, 1900년에는 밥만개공소가 설립되고, 부산본당의 신부가 1년에 몇 차례 사목 방문을 하였다. 1910년 조선이 일제에 의해 강제로 병탄되고, 1911년 4월 8일 조선교구가 경성교구와 대구교구로 분할되면서 경상도와 전라도 지역은 대구교구에 속하게 되었다.
김해 지역의 첫 본당은 1924년 박수창[시몬] 가족 7명이 진영 철하리로 이주하고, 1932년 목조 건물의 공소를 짓고 총독부의 허가를 받아 진영천주당으로 된 것이다. 아직은 신부가 파견되지 않아서 공소였는데, 1935년 6월 진영천주당에 정재석 신부의 부임으로 본당으로 승격되었다. 정신부는 1937년 신자들의 문맹 퇴치를 위해 해성학교를 설립하여 한글과 초등학교 과정을 가르쳤다. 일제 말기의 엄혹한 전시 체제 속에서도 진영성당은 새로운 세례자를 배출하고, 1939년에는 삼방공소도 설립하였다. 일제 말기의 혼란스러운 사회를 안정시키기 위해 신자들을 중심으로 치안대를 조직하여 치안 유지에 노력하면서 감격스러운 해방을 맞이하였다.
해방 이후 진영성당은 향상회(向上會)를 조직하여 천주교식 장례 예절을 정착시키고, 전교 활동을 체계적으로 실천하였다. 또한 성모회를 만들어 여신자들이 본당 활동에 적극 참여할 수 있도록 하여 본당을 활성화하였다.
[부산교구 설립과 김해성당 설립]
6·25전쟁으로 50여 만명의 피난민들이 부산으로 물려 들면서, 부산은 피난 교회의 중심지가 되었다. 김해 지역의 신자들은 피난가지는 않았지만 부산과 마찬가지로 함안 등 서쪽 지역에서 오는 신자들을 맞아 들였다. 휴전으로 전쟁이 끝나자, 부산항으로 들어오는 구호 물자를 본당이나 공소에서 나누어주었다. 이때 김해 지역의 진영성당과 공소들도 구호 물자를 받기 위해 세례를 받는 이들로 넘쳐났다. 늘어난 신자들과 구호물자를 이용하여 진영성당은 1956년에 새로운 성당을 완공하였다.
부산 지역 교세가 확장되면서 1957년 1월 21일 부산교구가 설립되고, 초대 부산교구장으로 최재선 신부가 임명되었다. 대구교구에 속해 있던 김해 지역은 자연스럽게 부산교구로 소속이 변경되었다. 이때 진영성당은 1959년 본당 신자들을 위한 공원 묘지를 매입하고, 연령회가 관리하도록 했다. 1959년 10월 29일 삼방공소가 김해성당으로 승격되고, 초대 주임으로 김태호[알로이시오] 신부가 임명되었다. 1964년 9월 1일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대구관구 소속 수녀들이 김해성당에 파견되었다. 이색적인 수도복과 수녀들의 노력으로 성당에 찾아와 세례를 받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마산교구 설립과 김해 지역 천주교회]
부산교구의 교세 확장과 본당의 증가로 인해 1966년 3월 5일에 마산교구가 설립되고, 초대 교구장으로 김수환[스테파노] 주교가 임명되었다. 그렇지만 여전히 김해의 진영성당과 김해성당은 부산교구에 포함되었다. 1973년 1월 29일 부산과 마산의 교구 경계 조정으로 인해 김해성당의 관할 지역은 부산교구에, 진영성당의 관할 지역은 마산교구에 속하게 되었다.
1978년 2월 15일 김해군 대저면, 명지면 전체와 가락면 일부 지역이 부산시 북구로 편입되었다. 1989년 1월 1일 가락면, 녹산면이 부산시 북구로 편입되었다. 이로써 김해성당 소속이었던 명지공소는 부산의 괴정성당 소속으로 변경되었다. 다만 울만공소는 부산의 구포성당 소속이지만 김해성당의 공소로 있다가 2004년 본당으로 승격되었다.
2023년 현재 부산교구 소속 김해 지역의 성당은 김해성당, 장유성당, 활천성당, 임호성당, 삼계성당, 장유대청성당, 율하성당, 연지성당, 지내성당 등 9개이고, 마산교구 소속 김해 지역의 성당은 진영성당, 진례성당, 생림선교성당 등 3개이다.
[김해 지역 천주교 특징]
전근대시기 천주교는 조정의 박해로 교세가 위축되어 있었지만 일제 강점기 때는 선교권을 보장한다는 명분으로 선교사들을 회유하면서 교세의 발전을 가져오기도 하였다. 하지만 진영성당처럼 해성학교를 설립하여 한글을 교육시키기도 하였다.
김해 지역의 천주교는 몇 가지 특징이 있는데 첫째, 교통이 편리한 곳에 일찍부터 공소를 설치하여 선교의 활성화를 도모하였다. 1924년에 장방천주당이 낙동강 인근에 설치되고, 1932년에 진영천주당이 진영역 근처에 설치된 것 등이 그 사례이다. 둘째, 6·25전쟁을 거치면서 천주교의 교세가 더욱 성장하였다. 교회가 피난 신자들에게 거처가 되었고, 해외 구호 물자를 배부하는 곳으로 활용되었기 때문이다. 셋째, 1990년대 이후로 김해 지역이 부산이나 창원의 배후 도시로 성장하면서 교세의 발전을 가져왔다. 특히 신도시 개발로 젊은층 신자들이 증가하고, 많은 공장들이 유치되면서 해외 노동자 신자들도 점차 증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