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40096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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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聖堂 |
영어공식명칭 | Roman Catholic Church |
이칭/별칭 | 천주교회 |
분야 | 종교/기독교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남도 김해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한건 |
[정의]
경상남도 김해시에서 천주교 신자들이 모여 미사를 보고 기도하는 장소.
[개설]
성당은 하느님을 경배하기 위해 지정된 건물이다. 이곳은 로마 가톨릭을 지향하는 천주교 신자들이 미사나 전례에 참여하기 위해 모이는 장소이다. 성당 안에는 제대를 중심으로 정면에 십자가가 있고, 성체 안에 현존하는 예수를 모신 감실 등이 포함된 거룩한 장소이다. 넓은 의미에서 성당은 하느님을 경배하기 위해 지정된 모든 건물을 말하기 때문에, 대성전은 물론 작은 경당 등도 성당에 해당된다. 반면에 공소는 본당의 성당보다 작은 규모의 경당을 가진 곳인데, 상주하는 사제가 없다. 공소에는 사제가 없기 때문에 정기적인 미사가 거행되지 못하고, 주일 미사의 의무는 본당 신부의 위임을 받은 공소회장이 공소 예절을 거행한다. 김해 지역에는 예전에 공소가 많았지만 본당으로 승격이 되고, 지금은 몇 곳만 남아있다.
[김해시의 성당 분포]
김해시에는 12개의 성당이 있다. 일반적으로 하나의 도시는 한 교구가 담당하는데, 김해시는 부산교구와 마산교구로 나누어져 있다. 1957년 부산교구가 설립될 당시에는 진영성당과 김해성당 2개가 있었다. 1966년 마산교구가 설립되었지만 김해 지역은 여전히 부산교구에서 담당하였다. 1973년 부산교구와 마산교구의 경계 조정으로 김해성당은 부산교구, 진영성당은 마산교구 소속이 되었다. 현재는 부산교구에서 9개 성당, 마산교구에서 3개 성당을 담당하고 있다.
[부산교구 관할 성당의 설립과 변천]
6·25전쟁 이후 부산 지역에 피난민들이 몰려들었고, 피난 온 신자들로 가득 차면서 성당은 피난교회의 중심 역할을 담당하였다. 교세가 급증하고 외국 교회의 지원이 부산을 중심으로 퍼져나갔다. 이에 교황청에서는 1957년 1월 21일 부산교구를 설립하였고, 김해 지역은 대구교구에서 부산교구 소속이 되었다.
6·25전쟁 당시 김해 지역 신자들은 피난을 가지 않았고, 오히려 전라도와 경상도 지역 등에 많은 신자들이 피난 온 것을 받아들였다. 당시 김해 지역에는 현 마산교구 지역인 진영성당 밖에 없었기에 늘어나는 교세를 감당할 수 없었다. 부산교구와 진영성당 신자들의 도움으로 1959년 9월 17일 삼방공소가 김해성당으로 승격되었다. 초대 주임으로 김태호[알로이시오] 신부가 임명되었다. 1964년 9월 1일 샬트로 바오로 수녀회가 김해성당에 파견되었다. 이색적인 수녀복을 입은 수녀들을 보고, 또 수녀들의 헌신적인 기도와 봉사를 보고 감동을 받은 주민들이 성당을 찾아와서 세례를 받기도 했다. 몇 번에 걸쳐 사제관 증축이나 교리실을 만들었지만, 현재 성전은 1984년 타데오 신부 때 착공되어 11월 19일 축성식을 가졌다.
1980년부터 한국교구설정 200주년과 103위 시성식으로 전국적으로 교세가 늘어났고, 김해성당도 신자가 늘어 분할이 요구되었다. 1962년 장유공소가 설립되었지만 교통의 불편과 신자의 감소로 3년만에 폐쇄되었다. 1988년 김해성당 석찬귀 주임 신부가 늘어난 신자들과 지역 복음화를 위해 장유공소를 재개하였다. 이후 교구의 지원과 신자들의 노력으로 1990년 6월 공소 건물이 마련되었고, 7월에 장유성당으로 분가해 나갔다.
김해성당에서 장유성당이 분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삼방동과 어방동 등지에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면서 신자들은 계속 늘어났다. 1991년 교구에서 삼방동에 성당 부지를 매입하였다. 1995년 2월 김해성당에서 분가한 활천성당이 설립되고, 초대 주임으로 박경빈[알렉시오] 신부가 임명되었다. 2000년 미완성된 성전을 2층 성전으로 완성하여 봉헌하였다. 2000년에 들어서면서 김해 내동과 외동에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고, 신자들이 증가하였다. 이에 교구에서는 2001년 2월 김해성당에서 임호성당을 분리하여 설립하고, 초대 주임으로 이석희[라우렌시오] 신부를 임명하였다.
2000년 삼계 지역에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자, 교구에서는 신자들이 늘어날 것을 예상하여 성전 부지를 매입하였다. 2004년 2월 김해북부성당의 설립이 인가되고, 9월에 김해성당으로부터 분리되면서 초대 주임으로 최현욱[베네딕도] 신부가 임명되었다. 2007년 3월 성당 봉헌식을 거행하였다. 이즈음에 김해시 삼문동에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고, 창원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주하였다. 부산교구에서는 2006년 1월 장유성당에서 분가한 장유대청성당을 신설하고, 초대 주임으로 이강우[클레멘스] 신부를 임명하였다. 이강우 신부는 성전 건립을 시작하여 4월 성전 봉헌식을 가졌다.
2010년 부산교구는 본당 설립 10개년 계획을 세워 매년 3개의 성당을 설립하고자 했다. 이에 늘어난 신자들과 앞으로 늘어날 것으로 예상하여 1월에 장유대청성당에서 율하성당을 분가하여 설립하고, 초대 주임 신부로 김형태[베드로] 신부를 임명하였다. 1년의 공사를 거쳐 2012년 4월 성전 봉헌식을 가졌다. 또한 2011년 김해성당과 임호성당에서 분가된 연지성당을 설립하고 초대 주임 신부로 서강진[스테파노] 신부를 임명하였다. 곧바로 성전 건축이 시작되어 2012년 5월에 성전 봉헌식을 가졌다. 활천성당의 넓은 관할 구역으로 지내동과 그 주변에 사는 신자들은 성당에 나오기가 불편하였다. 이에 2014년 9월 활천성당에서 분가하여 지내성당을 설립하고, 초대 주임신부로 김태환[요셉] 신부를 임명하였다
2019년 부산교구 지구 개편으로 삼계성당은 김해 지역을 관리하는 지구장 성당이 되고, 지구장으로 임영민[안드레아] 신부가 임명되었다.
[마산교구 관할의 성당]
진영성당은 김해시의 첫 성당이다. 1932년 진영읍에 목조 건물의 공소를 짓고, 총독부의 허가를 받아 진영천주당이 되었다. 아직 성당으로 승격하기에는 신자 수가 부족했지만 미래를 보고, 또한 성직자의 파견 등으로 1935년 6월 진영공소가 진영성당으로 승격되고, 초대 주임으로 정재석[요셉] 신부가 임명되었다. 진영성당은 일제 강점기의 전시 체제 아래에서도 꿋꿋하게 민족 운동과 신앙 생활을 병행하려고 노력하였고, 해방 이후의 혼란과 6·25전쟁을 겪으면서도 김해 지역의 유일한 성당으로 복음화에 앞장섰다. 교세가 확장되고, 1957년 부산교구가 설립되면서 김해 지역 성당 설립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이에 진영성당 신자들은 함께 노력하면서 1959년 10월 김해성당을 분가시켰다.
1966년 마산교구가 설립되었지만 김해 지역은 부산교구 관할이었기에 진영성당은 부산교구 소속 성당이었다. 1973년 부산 마산교구의 경계 조정으로 진영성당은 마산교구 관할 소속 성당이 되었다. 1957년 3월 진영성당 소속 진례공소가 설립되었지만 건물이 없어서 여러 곳을 전전하다가 1970년 공소 건물을 마련하였다. 낡고 협소한 공소를 대체할 공소 건물을 준비하여 1989년 11월 공소 건물을 준공하였다. 1998년 마산교구의 선교 확장으로 인해 진례공소가 진례준본당으로 승격되고, 초대 주임으로 황병석[파스칼] 신부가 임명되었다. 2009년 12월 진례준본당이 본당으로 승격되었다. 이때 진례성당 소속의 생림공소와 한림공소를 분가시키고, 이를 합하여 생림선교 성당을 만들어 농촌의 복음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