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401268
한자 神話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남도 김해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한양하

[정의]

경상남도 김해 지역의 김수로왕 관련 신화.

[개설]

입에서 입으로 전하는 구비 전승 문학은 기록 문학 이전의 문학으로 오랜 연원을 가지고 있다. 구비 문학은 설화라고 하는데 신화, 전설, 민담을 포괄한다. 수천 년 동안 사람들의 입을 통해 전승해 온 이야기들은 전하는 사람들에 따라 변개되는데, 화소가 첨가되거나 삭제, 변형되는 과정을 거치면서 현대까지 이어져 왔다. 오랜 역사를 지닌 이야기에는 구비 전승 주체들의 세계관, 가치관이 담겨 있기에 우리 전통문화의 보고(寶庫)라고 할 수 있다.

신화는 신들이 세상을 열었던 천지창조, 자연의 이치에 대한 연원을 밝히는 태초 신화와 청동기 문화에서 철기 문화로 이행하면서 국가가 건설될 때의 건국 영웅의 탄생과 건국 과정을 담은 건국 신화, 성씨의 시조 유래와 관련한 성씨 시조 신화, 무속의 굿노래에서 불렸던 무속 신화가 있다. 신화는 신성성을 특징으로 하며 기이하고 신묘한 사건들이 인물의 영웅적 면모를 알려 준다. 전설은 역사적 인물이나 장소에 얽힌 이야기로 증거물이 남아 있는 이야기들이다. 전설에는 인물 전설, 지명 전설 등이 있다. 민담에는 삶의 지혜와 해학을 담은 백성들의 이야기, 자연물들의 유래담, 우스개 등이 있다.

김해 지역에서 전해오는 구비 문학에도 신화, 전설, 민담이 고르게 나타난다. 김해는 특히 가야 시대의 오랜 역사와 전통을 지닌 도시로 「수로왕신화」가 전해오고 있다. 다른 지역의 경우 지역과 관련한 신화가 전승되는 경우가 드문데 김해는 금관가야의 수도로 김수로왕과 관련한 신화와 전설, 민담이 남아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김해 지역의 신화]

문헌 설화에 전하는 신화로 『삼국유사(三國遺事)』 제2 기이편 「가락국기(駕洛國記)」에는 구지봉(龜旨峰)에서 김수로왕의 탄강, 백성들이 김수로왕을 맞기 위해 불렀던 「구지가(龜旨歌)」, 김수로왕과 석탈해(昔脫解)의 겨루기, 허황옥(許黃玉) 맞이와 혼인, 김수로왕의 죽음과 기림과 관련한 이야기가 전하고 있다.

구지봉에서 김수로왕의 탄강은 황천의 명으로 가락국의 왕이 된 내력을 담고 있다. 구간과 백성들이 구지봉에서 왕을 맞이하기 위해 「구지가」를 부른다. 머리를 내놓지 않으면 구워 먹겠다는 위협을 할 정도로 간절하게 왕을 원하는 백성들의 마음이 담겨 있다. 자줏빛 줄이 내려오니 금합이 있었고, 그 안에 든 여섯 개의 알에서 여섯 가야를 맡을 왕이 태어난다. 김수로왕금관가야를 맡고, 다른 알에서 태어난 시조들이 오가야를 맡게 되면서 가야국이 세워졌다는 내용이다.

김수로왕과 석탈해의 겨루기 이야기는 김수로왕의 권능을 담고 있다. 완하국(琓夏國) 함달왕(含達王)과 부인이 알을 낳았고, 그 알이 사람이 되어 ‘탈해(脫解)’라고 하였다. 탈해는 키가 3척이고 머리둘레가 1척이나 되었다. 김수로왕을 찾아와 왕의 자리를 빼앗겠다고 하자 김수로왕은 하늘의 명으로 나라를 맡았으니 함부로 줄 수 없다고 한다. 탈해가 술법으로 겨루자고 하여 김수로왕이 좋다고 하였다. 탈해가 로 변신하니 김수로왕독수리가 되고, 탈해가 참새가 되니 김수로왕은 새매가 되었다. 이에 탈해가 항복하고 물러났다. 변신하여 겨루기를 하는 화소들은 서사무가 「차사본풀이」에서 강림도령과 염라왕의 변신 겨루기에도 등장한다. 신들의 신이한 능력, 변신술을 자유자재로 운용하여 승리한 자의 권위를 드러내고 있다.

허황옥 맞이와 혼인 이야기는 금관가야의 번성을 담고 있다. 구간들은 김수로왕에게 혼인을 권하나 왕후를 맞이하는 것 또한 하늘의 명이 있을 것이라고 염려하지 말라고 한다. 그 후 김수로왕은 유천간(留天干)에게 명하여 경주(輕舟)를 이끌고 준마(駿馬)를 가지고 망산도(望山島)로 가서 기다리라고 한다. 그때 붉은 돛을 단 배가 붉은 기를 달고 오고 있었다. 김수로왕은 그 말을 듣고 구간을 보내 목련으로 만든 키를 잡고 계수나무로 만든 노를 저어 맞이하였다. 그러나 왕후가 경솔하게 신하들을 따라갈 수 없다고 하여 김수로왕이 직접 행차하여 왕후를 맞이하였다. 왕후는 산 밖의 별포(別浦) 나루에 배를 대고 땅으로 올라와 높은 언덕에서 쉬고, 입고 있는 비단 바지를 벗어 폐백으로 삼아 산신령(山神靈)에게 바쳤다. 왕후를 모시고 온 신보(申輔)·조광(趙匡), 그들의 아내 모정(慕貞)·모량(慕良), 노비들까지 모두 20여 명이 왔다. 왕후는 자신이 아유타국(阿踰陀國)의 공주로 부모님의 꿈에 가락국수로가 배필을 삼게 하라고 하여 배를 타고 왔다고 했다. 김수로왕허황옥을 왕후로 맞이하여 자식들을 낳았고 왕권을 계승할 수 있게 되었다.

김수로왕의 죽음과 관련한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189년 3월 1일에 왕후가 죽으니 나이가 157세였다고 한다. 나라 사람들이 슬퍼하여 구지봉 동북 언덕에 장사하였다. 백성들은 허황옥을 기려 왕후가 처음 와서 닻줄을 내린 도두촌(渡頭村)을 ‘주포촌(主浦村)’이라 하고, 비단 바지를 벗은 높은 언덕을 ‘능현(綾峴)’이라 하고, 붉은 기가 들어온 바닷가를 ‘기출변(旗出邊)’이라고 하였다. 김수로왕은 왕후가 죽은 지 십 년이 지나 199년 3월 23에 죽으니 나이가 158세였다고 한다. 대궐 동북쪽 평지에 빈궁(殯宮)을 세웠는데 높이가 1장이고 둘레가 300보였고, 거기에 장사 지내고 ‘수릉왕묘(首陵王廟)’라고 하였다. 아들 거등왕(居登王)으로부터 9세손 구충왕(仇衝王)까지 이 묘(廟)에 배향(配享)하고, 매년 정월(正月) 3일과 7일, 5월 5일과 8월 5일과 15일을 기다려 풍성하고 깨끗한 제물을 차려 제사를 지내어 대대로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신들의 생명과 나이는 범인의 시간과 달리 인식된다. 『삼국유사』에 나온 단군의 나이가 1,908세인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후 김수로왕을 기리기 위한 놀이와 가락국의 흥망에 대해 『삼국유사』에서는 매년 7월 29일에 백성·서리(胥吏)·군졸(軍卒)들이 승점에 올라가서 장막을 치고 술과 음식을 먹으면서 떠들며 동서쪽으로 서로 눈짓을 보내고 건장한 인부들은 좌우로 나뉘어서 망산도에서 말발굽을 급히 육지를 향해 달리고, 뱃머리를 둥둥 띄워 물 위로 서로 밀면서 북쪽 고포(古浦)를 향해서 다투어 달리는 놀이를 하였다고 전한다. 이는 옛날에 유천간과 신귀간 등이 왕후가 오는 것을 바라보고 급히 김수로왕에게 아뢰던 것을 놀이로 전승한 것이다. 또 김수로왕의 8세손 김질왕(金銍王)허황후(許皇后)의 명복(冥福)을 빌고자 김수로왕허황후가 혼인한 곳에 절을 세우고 절 이름을 ‘왕후사(王后寺)’라 하였다. 이 절이 생기고 500년 후에 장유사(長遊寺)를 지었는데 왕후사를 폐해서 마구간으로 쓰고 있어 탄식을 하는 일연(一然)의 후기가 남아 있다.

구비 설화로 전하는 이야기는 김해 지역에서 두 편이 있는데 「김해 김씨와 김해 허씨」에서는 김수로왕허황옥의 성씨가 본이 같아 혼인을 할 수 없다는 이야기로 성씨 시조 신화로 볼 수 있다. 또 「김수로와 허황후」에서는 김수로왕허황옥을 거인으로 묘사, 큰 성기를 특징으로 한 이야기도 전하고 있는데 이는 백성들에게 풍요를 가져다준 임금으로 인식되었음을 알 수 있다. 문헌 설화에서 전하는 내용과 달리 구비 설화에서는 김해 김씨의 가문 의식과 백성들에게 풍요를 가져다 준 훌륭한 임금과 왕후의 능력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마음이 담겨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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