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400636
한자 首露王
이칭/별칭 김수로,김수로왕,수로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왕족·호족
지역 경상남도 김해시
시대 고대/삼국 시대/가야
집필자 김양훈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혼인 시기/일시 48년 - 수로왕 허황옥 혼인
몰년 시기/일시 199년연표보기 - 수로왕 사망
묘소|단소 김해 수로왕릉 - 경상남도 김해시 가락로93번길 26[서상동 312]지도보기
성격 왕족
성별
본관 김해

[정의]

삼국 시대 경상남도 김해 지역에 있었던 가락국의 제1대 왕.

[개설]

수로왕(首露王)가락국[일명 금관가야] 최초의 왕이다. 재위 기간은 『삼국유사』「가락국기」에 의하면 서기 42~199년이다.

[가계]

수로왕이 하늘에서 구지봉으로 내려왔고, 9간이 수로왕을 맞이하였다는 『삼국유사』「가락국기」의 내용으로 보아 수로왕은 이주민 세력인 것으로 짐작된다. 수로왕의 출자와 관련하여 『삼국사기』 김유신전에서는 “유신비에서도 또한 헌원의 후예요, 소호의 자손”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이 기록은 김유신의 12세조인 수로왕의 출자라기보다는 금관가야계 진골이 김씨 성을 태종무열왕 즉위 후에 받은 것과 연관되며, 수로왕의 출자 근거라고 할 수는 없다. 한편, 『신증동국여지승람』 고령현 조에 기록된 최치원의 「석이정전」에는 가야산신 정견모주와 천신 이비가의 아들인 뇌질청예가 수로왕이라고 적었지만, 저자는 이 기록이 허황된 것이라 믿을 수 없다고 적었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의하면, 수로왕은 아유타국 출신 공주인 허황옥과 혼인하였으며, 태자 거등왕을 두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1634년에 간행된 송인(宋寅)의 『이암유고(頤菴遺稿)』에는 수로왕허황옥 사이에 10명의 아들이 있었다고 전하며, 이후의 금석문과 읍지류에서도 대동소이하게 『이암유고』의 기록을 따르고 있다.

[활동 사항]

수로왕의 활동은 내치와 외치로 구분된다. 우선 내치를 보면, 43년에 신답평에 1,500보 둘레의 나성과 궁궐 전각 및 여러 관사와 무기고·창고를 세우기 시작하여 44년 2월에 완공하였다. 허황옥과의 혼인 후 구간의 직위를 바꾸고, 이후 신라·한의 직제와 주의 법제를 따라 나라를 다스렸다고 전한다. 외치는 완하국 출신 탈해가 금관국을 침입하자, 탈해를 막고 계림 땅 경계까지 추격하다가 돌아왔다고 전한다. 수로와 탈해의 관계에 대하여 『삼국유사』 탈해왕 조에는 “가락국수로왕이 신하 및 백성들과 더불어 북을 치고 환호하며 맞이해 장차 가락국에 머무르게 하려 하였으나……”라고 기록되어 있어 「가락국기」의 내용과 차이를 보인다.

한편, 수로왕의 외치와 관련하여 「가락국기」에 기록되지 않았지만, 『삼국사기』「신라본기」 파사이사금 23년(102) 8월조에 따르면 음즙벌국과 실직곡국 간의 영토 분쟁이 일어나자, 파사이사금의 요청으로 수로왕이 분쟁을 중재하였다고 한다. 이때 한기부주가 불만을 품고 파사이사금이 개최한 연회에 지위가 낮은 사람을 보내자, 수로왕은 노복 탐하리(耽下里)를 시켜 한기부주를 죽이고 돌아가 버렸다.

[묘소]

수로왕이 199년 3월 23일에 사망하자, 대궐의 동북방 평지에 빈궁을 세워 장사를 지내고, 무덤을 ‘수로왕묘’라고 칭하였다고 한다. 현재 수로왕릉경상남도 김해시 서상동에 있는데, 왕릉 구역 안에는 수로왕의 위패를 모신 팔전 중의 하나인 숭선전(崇善殿), 안향각·전사청·제기고·납릉정문·숭재·동재·서재·신도비각·홍살문·숭화문 등 건물들, 신도비·문무인석·마양호석·공적비 등의 석조물이 있다.

[상훈과 추모]

수로왕 사후 거등왕부터 9대손 구해왕까지 사당에 배향하고 매년 제사를 지냈으며, 661년에 이르러 문무왕이 조서를 내려 종묘에 합쳐 제사를 지냈다. 신라 말에는 수로왕 제사 주재를 둘러싼 분란이 있었으나 결국 왕의 진손이 지내게 되었다. 고려 문종 때는 능묘의 수호 경비로 쓸 토지를 마련하여 충실히 향사를 지냈다.

조선 개국 이후에도 국가에서 직접 관장하지는 않았지만 해마다 제향은 계속되었다. 1580년(선조 13)에는 경상도관찰사 허엽(許曄)이 납릉(納陵)과 후릉(后陵)을 크게 보수하고 제의(祭儀)를 정비하였다. 임진왜란 이후 훼손된 수로왕릉 중수와 복구가 이루어지면서 제의의 격이 높아졌고, 1792년(정조 16)에는 정조의 전교로 가락국 시조왕릉 춘추시향의절을 상정하여 매년 국왕의 이름으로 춘추대제 축문을 고하고, 예조에서 향(香)과 폐백[幣] 등 6품목을 마련하였다. 1878년(고종 15)에는 김해부사 허전(許傳)이 납릉에 전호(殿號)를 내려달라고 상소하여 ‘숭선’으로 사액되었다. 그동안 김해 지역 후손과 사족들에 의해 국가 제례로 인정해 달라는 상소가 계속되었는데, 이때 ‘숭선전’으로 사액됨으로써 비로소 숭선전제례는 국가의 공식적인 제향으로 승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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