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남정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400317
한자 高句麗 南征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남도 김해시
시대 고대/삼국 시대/가야
집필자 김양훈

[정의]

400년 고구려와 신라의 연합군이 가락국의 경역에 있었던 임나가라의 종발성을 비롯한 낙동강 이동 지역에 진출한 사건.

[개설]

고구려 남정은 광개토왕릉비문에 기록된 경자년, 즉 400년에 벌어진 고구려의 신라 구원전이며, 고구려 남정을 계기로 5세기 가락국의 쇠퇴와 가라국, 안라국 등 가야 제국의 급격한 변화를 야기한 사건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러나 광개토왕릉비문 경자년조는 180자 중 80여자가 판독이 불가능하거나 불안정하여 광개토왕릉비문을 토대로 한 가야사 연구에서 그동안 주목되어 왔던 “임나가라종발성(任那加羅從拔城)”의 위치, “안라인수병(安羅人戍兵)”의 성격 등에 대해 접점을 찾지 못하였다. 쟁점이 되는 사안에 대한 연구자들의 해석에 따라 고구려 남정의 전황과 전쟁 당시 가야 제국의 동향, 남정의 영향에 대하여 다양한 역사상이 도출되고 있다.

[역사적 배경]

400년 고구려 남정은 399년 신라 사신의 구원 요청에 의해 수행되었다. 즉, 왜가 백제와 화통하면서 신라를 침입한 사실을 광개토왕이 신라를 통해 인지하였고, 계책을 마련하여 왜군 섬멸전을 진행한 것이었다. 고구려가 왜를 섬멸 대상으로 인식한 계기는 377년, 381년 신라의 전진 방문시 고구려를 통해 이루어진 점에서 추측된다. 신라가 고구려를 통해 전진을 방문한 것은 당시 신라와 백제의 관계가 소원하였고, 왜로부터 여러 차례 침입을 받으면서 중국으로 갈 수 있는 해로가 차단되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이로 말미암아 고구려를 통해 전진과의 교섭이 이루어졌는데, 이때 고구려는 신라와의 우호를 다지면서 신라로부터 왜에 대한 정보를 획득하였을 것이다. 왜와 적대관계인 신라로부터 정보를 획득하였고, 이런 와중에 고구려와 대적한 백제와 화통한 사실을 입수하면서 고구려는 왜를 섬멸 대상으로 확고히 인식하였을 것이다. 고구려가 주변국과 전쟁을 개시할 때 명분을 앞세워 수행해 왔던 점을 고려하면, 400년 고구려의 남정은 섬멸 대상인 왜의 신라 침입이라는 전제 하에, 고구려의 영향력 아래 있었던 신라를 구원한다는 명분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경과]

광개토왕릉비문에 의하면, 400년 고구려 남정은 399년 신라 구원 대책을 마련한 후, 고구려가 보병과 기병 5만을 파견하여 신라 영역 내의 왜를 축출한 후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를 정치적 종속 관계로 이끌어낸 사실을 적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임나가라 종발성”과 “안라인수병” 문제로 가야 제국의 참전에 대하여 연구자들은 제각각의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우선 고구려군에 귀복한 임나가라 종발성은 김해 봉황토성, 부산 배산성, 양산-밀양 등으로 비정하였는데, 광개토왕릉비문에서 고구려가 주변국의 특정 지역을 공격할 때의 표현은 “과(過)”또는 “도(渡)”+지명을 적어 그 과정을 기술하였으므로, 임나가라 종발성은 낙동강 이동 지역의 어느 곳으로 비정할 수 있다. 보다 구체화 하자면, 『삼국사기』에서 알 수 있듯이 신라를 공격한 왜적[왜구]이 재빠른 퇴각을 위해 침입로로 향하는 점을 고려하면, 400년 왜의 종발성 퇴각은 그들이 신라를 침입한 길과 관련되었다고 볼 수 있다. 4세기 후반~5세기 전반 왜의 신라 침입로가 동쪽 변경 혹은 남쪽 변경을 통하였는데, 400년 전쟁에서 임나가라의 참전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왜가 침입한 곳은 신라 남쪽 변경이었다. 이곳은 418년 박제상이 삽량주간을 지낸 점, 463년 삽량성을 침입한 왜를 물리친 점, 524년 법흥왕은 새로 개척한 남쪽 경계에 행차하여 가락국왕을 만난 점, 신라의 직접 지배 근거인 신라계 성곽이 5세기 전·중반에 축조된 양산과 언양 경계의 순지리토성에서 보이는 점, 5세기 후반~6세기대 양산-밀양의 낙동강 연안에 신라계 제철 유적이 분포한 점 등으로 미루어 보아 신라 남쪽 변경 즉, 임나가라 종발성은 양산 지역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또 다른 문제인 안라인수병은 비문에 모두 세 차례가 나오는데, 앞뒤의 문구가 대거 떨어져 나가 그것의 의미를 구체화하기 어렵다. 다만, 첫 번째의 “안라인수병” 자구 위치가 “임나가라 종발성”의 행위 이후에 적힌 점, “라인”을 약칭으로 볼 수 없는 점, 결락이 심한 두 번째의 “안라인수병” 앞뒤 문자가 동사로 보이는 점, 고구려군 활동의 마무리 조치는 여러 번 적지 않았던 점을 고려한다면 안라인수병을 “안라인 수비병”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갑작스런 안라인수병의 참전이 의아하지만, 4세기 안라국과 신라의 토기 생산 기술과 유통의 공유가 양국 간의 인적 교류를 한층 발전시켜 수장층 간의 교류로 전개되었던 상황을 전제로, 399년 고구려가 신라에 전한 “□계”[□계획]에 안라인수병과 관련된 전략과 전술을 마련하였고, 그 일환으로 고구려-신라 연합군은 낙동강 이동 지역의 형세에 익숙한 안라인을 활용하여 남정을 주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결과]

고구려 남정 이후 남부 가야 제국에서는 여러 지역에 고총 고분 및 대형 고분군 조영, 가야 토기의 지역 양식 다변화, 무기, 갑주 등 무장적 성격의 철기 급증 등 물질 자료의 변화가 두드려졌다. 이 변화의 계기는 고구려 남정에서 찾고 있지만, 그 영향에 대해 서로 의견을 달리하고 있다. 즉, 5세기 대 남부 가야 제국의 성쇠 과정에 남정의 영향이 직접적이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거니와 반대로 그다지 크지 않았던 것으로 이해하기도 하였다.

한편 가락국의 쇠퇴에 대한 논쟁 과정에서 연구자 간의 의견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났는데, 전쟁 이후 신라와 가야의 정세, 물질 문화의 변화 등 여러 근거에 대한 시각이 서로 달랐기 때문이었다. 다양한 시점에서 시대상을 도출하였다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지만, 일부에서 편협하고 일방적인 해석으로 남정 이후 가야 제국 동향을 분석한 것은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기록된 좌지왕대 신라의 가락국 침입 시도는 400년 고구려 남정의 연속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다. 광개토왕릉비문에서 고구려·신라 연합군의 임나가라 공격은 1회에 불과하지만, 고구려가 왜를 섬멸하기 위한 가야 지역 공격은 일회성에 그치지 않았을 것이다. 『삼국사기』에서 407년 왜의 신라 남변 침입, 408년 신라의 대마도 공격 모의, 418년 전후 고구려·신라의 왜 공격 도모 등의 사실로 보아도 고구려와 신라는 400년 남정 이후 왜를 섬멸하기 위해 가야 지역에 대한 지속적인 진출을 시도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가락국은 400년 고구려 남정 이후 고구려·신라의 지속적인 압박으로 인하여 『삼국유사』「가락국기」에 전하는 좌지왕대 국정 혼란을 빚는 등 점차 쇠퇴하게 된 것이다.

[의의와 평가]

현재 고구려 남정을 통한 가야사 연구는 광개토왕릉비문이 심각하게 마멸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양하게 이루어졌지만, 그것에 따른 적잖은 한계가 있음을 부정하기 어렵다. 향후 가락국사 복원을 위해서는 고구려 남정 뿐만 아니라 그것을 둘러싼 문헌, 고고학적 연구가 활성화될 필요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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