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400461 |
---|---|
한자 | 克齋集 |
영어공식명칭 | Geukjae-jip |
분야 | 역사/근현대,문화유산/기록 유산 |
유형 | 문헌/전적 |
지역 | 경상남도 김해시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구진성 |
[정의]
경상남도 김해에 세거한 조선 후기 학자 노필연의 문집.
[저자]
노필연(盧佖淵)[1827~1885]의 자는 한약(漢若), 호는 극재(克齋)이며, 본관은 광주(光州)이다. 경상남도 창녕에서 태어났다. 옥촌(沃村) 노극홍(盧克弘)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노봉문(盧奉文)이고, 외할아버지는 파평 윤씨 윤사명(尹師明)이다. 어릴 적부터 할아버지에게 천자문 등 기초적인 한문 지식을 익혔고, 9세 때는 오순세(吳順世)에게 『자치통감(資治通鑑)』을 배웠다. 이후 노우연(盧愚淵)에게 주역을 배우고, 유흥귀(柳興龜)에게 과거 시험 문장을 익혔다.
1855년에 부친상을 당한 이후 과거 공부를 그만두었고, 1864년 두 아들과 함께 김해부사로 재직하던 허전(許傳)을 찾아가 제자가 되었다. 허전이 지은 여러 저술을 성실히 공부하였고, 허전에게서 극기설(克己說)을 전수받았다. 1870년 허전이 지은 사의(士儀)를 함안에서 인출하는 일을 주도하였다. 창녕 국동에서 세상을 떠났다. 처는 창녕 성씨로 성욱호(成郁鎬)의 딸이다.
[편찬/간행 경위]
노필연이 1885년 4월 6일 사망하자, 노필연의 두 아들 노상익(盧相益)과 노상직(盧相稷)의 주도로 1897년 『극재집』이 간행되었다. 서문은 김익용(金益容), 정래석(鄭來錫), 박치복(朴致馥)이 썼다. 노상익의 기록에 따르면, 본래 노필연의 원고는 20편이 넘었으나 1886년 아우 노상직과 함께 간추려 10편으로 만들고, 스승의 편지와 창수(唱酬)한 시문을 부록으로 만들어서 여러 학자들에게 교정을 요청하였더니, 향산(響山) 이만도(李晩燾)를 추천하였다고 한다. 노상직이 여러 학자들의 뜻을 가지고 이만도에게 가서 “제 선친은 글을 지을 때 정밀하고 간략하기를 추구했는데, 지금 문집에서 번거롭거나 지나친 부분을 제거하지 않으면 선친을 뜻을 저버리는 것이 됩니다.”라고 하니, 이만도는 승낙하고 원고 중에서 느슨하다 싶은 부분을 골라 정리하였다. 그래서 처음 원고 중 온전히 남은 작품은 「사의증주(士儀增註)」·「사서고략(四書攷略)」·「상례유고(喪禮類攷)」 등에 불과하였다.
이후 1895년 국가에 큰 난리가 나자, 노상익은 창녕에서 밀양 재약산으로 피난을 갔는데, 난리통에 선친의 문집을 잃어버릴까 염려하여 학정계(學正契)의 여러 인물들과 비용을 의논해서 1896년 늦가을 『극재집』 간행에 착수하였다. 7개월이 걸려 간행이 끝났는데, 『극재집』의 본집과 부록은 모두 8권 4책이었고, 목판은 모두 150여 판이 되었다.
[형태/서지]
8권 4책의 목판본으로, 오침안 선장본으로 되어 있다. 판식은 사주단변(四周單邊)으로, 계선(界線)이 있으며, 내향이엽화문어미(內向二葉花紋魚尾)이다. 반곽(半郭)의 크기는 20.6×16.2㎝이다. 1면 10행에 1행의 자수는 20자이다. 권수제와 판심제는 ‘극재집(克齋集)’으로 되어 있다. 주(註)는 쌍행(雙行)이다.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소장되어 있다.
[구성/내용]
1권에는 시(詩), 2권에는 편지, 3권과 4권에는 잡저, 5권에는 서(序) 등 각종 문체, 6권에는 전(傳), 7권과 8권에는 노필연과 관련된 인물들이 고인에 대해 쓴 부록 문자가 수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