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 나전리 토루 터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400585
한자 金海 羅田里 土樓 -
영어공식명칭 Gimhae Najeonri Fort
이칭/별칭 나전리 토루 터,김해 나전리 보루 터,나전리 보루 터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터
지역 경상남도 김해시 생림면 나전리 산92-1
시대 고대/삼국 시대/가야
집필자 안성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소재지 김해 나전리 토루 터 - 경상남도 김해시 생림면 나전리 산92-1 지도보기
성격 토루 터|보루 터
지정 면적 475㎡

[정의]

경상남도 김해시 생림면 나전리에 있는, 삼국 시대 금관가야가 쌓은 보루의 터.

[변천]

김해 나전리 토루(金海 羅田里 土樓)는 5세기 후반~6세기 전반에 사용된 금관가야의 보루이며, 주변에서도 다수의 보루가 확인되었다. 보루의 성벽에는 한 차례 고쳐 쌓은 흔적이 남아 있다. 내부는 주거 지역과 의례 및 저장 공간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보고서에는 보루의 구조를, 목책 도니성(木柵 塗泥城)이며 내부의 생활부를 포괄하는 지붕이 세워진 토굴과 유사한 형태로 표현하였다. 그러나 발굴 조사에서 기둥을 받치는 초석이 확인되지 않았다는 점과 성벽에 수축이 이루어졌다는 점 등을 고려할 때, 성벽은 순수 판축 토성, 성 내부는 개별 주거지에 지붕을 세운 구조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보루는 인위적으로 폐기한 것이 분명한데, 폐기한 주체가 금관가야인지 신라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한강 유역의 고구려 보루 중 신라군의 급습으로 인해 폐기된 구의동 1보루와 비교할 수 있다. 구의동 1보루는 규모가 약 46m이며, 면적은 172㎡이다. 내부에서 온돌 1기와 배수로 1기, 저수 시설 1기가 조사되었으며, 유물은 토기 19기종 최소 369개체와 철기 1,347점이 출토되었다. 이 중 철기는 무기류와 농공구류, 생활용품으로 나누어지며, 출토된 무기류를 근거로 10명~14명의 인원이 상주하였다고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김해 나전리 보루의 폐기 양상은 구의동 1보루와는 차이가 분명하므로, 적군의 기습이나 공격에 의한 것이 아니라 금관가야가 자발적으로 폐기한 것으로 판단된다.

[위치]

김해 나전리 토루 터김해시 생림면 나전리 산92-1번지, 삼량진에서 김해 시가지로 이어지는 교통로의 서쪽 산 정상에 자리한다. 김해시 생림면의 ‘나전리’는 이전부터 나전(羅田) 이외에 나현(羅峴) 또는 노현(露峴)이라는 지명으로 불리는 고개이다. 옛 지도를 보면, 김해도호부(金海都護府)를 중심으로 생림면의 입구에 해당하면서 낙동강(洛東江) 지역에서 김해도호부 쪽으로 진입하는 길목의 요충지(要衝地)이다.

[발굴 조사 경위 및 결과]

김해 나전리 토루는 김해 토취장 건설을 위해 해발 182m 산 정상부를 개발할 때 우연히 발견되었다. 발굴 조사 결과 금관가야가 축조한 보루이며, 주변 봉우리에도 다수의 보루가 축조되었음이 밝혀졌다. 보루의 평면 형태는 동서 방향으로 긴 장타원형에 가깝다. 규모는 길이 106m의 소규모 판축 토성이며, 내부 면적은 475㎡, 성벽의 너비는 5m, 남아 있는 높이는 1m인데, 초축 당시에는 적어도 2.5m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성벽은 12구간에 걸쳐 작업이 이루어졌다. 한 구간의 길이는 7m, 목주의 수는 7개이다. 성벽의 외부는 외황과 같이 굴착되어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외부의 상대적인 높이는 3m 이상이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추정 성문은 남쪽 경사면에 남아 있다. 후대의 훼손으로 인해 정확한 평면 형태는 알 수 없으며, 확인된 규모는 폭 1.4m, 길이 4m이다. 바닥은 불을 피워 소결(燒結)하여 성벽과 문 터 사이를 견고하게 다졌던 것으로 보인다. 바닥에서는 배수로(排水路)가 조사되었다. 배수로는 성문 중앙 아래에 성벽과 직교하게 설치된 암거식(暗渠式) 배수로인데, 바닥을 단면 ‘V’자 형태로 굴착한 후 그 내부를 ‘U’ 자형으로 재굴착하여 배수가 용이하게 하였다. 내부의 외측면으로는 직경 30㎝의 할석을 일정하게 쌓아서 보강하였다.

보루 내부는 문 터를 중심으로 4개의 주거 공간으로 분리되며, 각각의 공간은 자연 요철 면을 다듬은 후 주거 상면으로 사용하였다. 기둥 구멍[주혈]은 토루 내부의 중앙부에서 일정 간격으로 떨어진 지점에 벽구를 중심으로 말발굽 형태로 배치되었다. 주거 공간 내부, 토루와의 경계 지점에서 배연 시설로 추정되는 구조물이 확인되어 취사와 난방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보루 내부 주거지는 구들 시설·배연 시설이 설치된 공간과 취사와 관련 없는 하나의 독립된 공간으로 나누어지며, 후자는 의례와 저장 공간으로 사용되었다.

유물은 주거 공간과 토루 외측, 화재로 인해 퇴적된 흙 내부에서 토기와 말모양 철기가 출토되었다. 유물은 토기가 다수를 차지하는데, 장동옹(長胴擁)과 짧은 목 항아리[단경호(短頸壺)], 연질발(軟質鉢) 등의 연질류 생활 토기가 주류를 이룬다. 함께 출토되는 도질 토기(陶質 土器)는 짧은 목 항아리와 굽다리 접시[고배], 뚜껑[蓋] 등인데, 전반적으로 소성(燒成) 상태가 불량하며 다리[대각(臺脚)]나 꼭지부가 없는 상태로 출토된 형태가 많았다. 시기는 금관가야 멸망[532년] 이전 단계인 5세기 후반~6세기 전반에 해당한다.

[현황]

발굴 조사 후 기록 보존을 거쳐 공사를 진행하였기 때문에, 현재 성벽은 사라지고 없다.

[의의와 평가]

김해 나전리 토루가야 지역에서 최초로 확인된 보루 유적이다. 발굴 조사를 통해 삼랑진에서 김해 시내를 잇는 교통로상에 다수의 보루가 위치하였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금관가야의 관방 체계와 보루의 구조, 축조 수법을 파악할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유적이며, 이와 더불어 신라의 서진으로 금관가야가 복속된 과정을 복원할 수 있는 자료가 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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