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 양동산성 동문 터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400586
한자 金海 良洞山城 東門 -
영어공식명칭 Gimhae Yangdong Mountain Fortress East Gate
이칭/별칭 가곡산성 동문 터,내삼리 산성 동문 터,가곡산성 동문지,내삼리 산성 동문지,김해 양동산성 동문지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터
지역 경상남도 김해시 주촌면 양동리 산39-1
시대 고대/삼국 시대/신라
집필자 안성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문화재 지정 일시 1988년 12월 23일 - 김해 양동산성 경상남도 기념물 제91호 지정
발굴 조사 시기/일시 2010년 - 김해 양동산성 동문 터 동아세아문화재연구원에서 발굴 조사 실시[2010]
발굴 조사 시기/일시 2011년 - 김해 양동산성 동문 터 동아세아문화재연구원에서 발굴 조사 실시[2011]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21년 11월 19일 - 김해 양동산성 문화재청고시 제2021-141호에 따라 문화재 지정 번호 삭제
소재지 김해 양동산성 동문 터 - 경상남도 김해시 주촌면 양동리 산39-1 지도보기
출토 유물 소장처 국김해박물관 - 경상남도 김해시 가야의길 190[구산동 232]지도보기
성격 성문 터
문화재 지정 번호 경상남도 기념물[김해 양동산성 동문 터 포함 김해 양동산성]

[정의]

경상남도 김해시 주촌면 양동리에 있는 신라 시대 김해 양동산성의 동문 터.

[개설]

김해 양동산성(金海 良洞山城) 동문은 6세기 신라가 축조한 퇴뫼식 석축 산성인 양동산성 동쪽 성벽 중앙에 설치되었던 성문이다. ‘양동산성’이라는 이름은 행정 구역과 관련이 있다. 조선 시대에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에 “가곡산성(歌谷山城)은 부의 서쪽 20리[7.85㎞]에 있다. 돌로 쌓았으며, 둘레가 600척[181.82m]이고 성안에 우물이 하나 있다. 지금은 못쓰게 되었는데, 요새지로 만들 만한 곳이다”라고 기술되어 있다. 이후의 『김해부읍지(金海府邑誌)』와 『여도비지(輿圖備志)』, 『대동지지(大東地志)』,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서도 비슷한 내용을 전하고 있다. 따라서 초축 당시 양동산성의 이름은 알 수 없으나 늦어도 조선 시대 후기에는 가곡산성으로 불렸음이 분명하며, 내삼리 산성(內三里 山城)라고도 불렀다고 전한다.

[위치]

김해 양동산성 동문 터김해시 주촌면 양동리 산39-1번지에 있다. 김해 양동산성의 성문은 북문과 남문, 동문 등 3개소가 설치되었는데, 이 중 동문은 동쪽 성벽 중앙에 위치하였다.

[발굴 조사 경위 및 결과]

1988년 동아대학교 박물관에서 『문화유적분포지도』 제작을 위해 김해 양동산성에 대한 지표 조사를 실시하였고, 이후 2006년 ‘김해 양동산성 보수 정비 계획’에 따라 경남문화재연구원에서 정밀 지표 조사를 진행하였다. 2008년에는 동아세아문화재연구원에서 남벽과 남문 터, 북문 터 및 성내 부속 시설[집수지, 건물터 등]에 대해 시굴 조사를 하였다. 김해 양동산성 동문 터에 대해서는 2010년과 2011년 등 두 차례에 걸쳐 발굴 조사를 실시하였는데, 그 결과 한 차례 수축이 이루어진 현문식 성문을 확인하였다.

동문 터는 현문식으로 축조되었으며, 성문의 외벽은 사질 점토를 다져서 보강하였다. 성문과 외벽이 연결되는 부분을 호형(弧形)로 처리하였다는 점이 특이하다. 이러한 형태의 축성법은 백제 성곽의 특징으로 알려져 왔는데, 김해 양동산성과 그 외 하동 고소성(河東 姑蘇城), 창녕 구진산성의 수축 성벽 내벽, 거제 다대산성(巨濟 多大山城), 서천남산성(舒川南山城), 아산시의 신창학성(新昌鶴城) 등에서도 확인되었다. 이들 산성의 축성 시기는 6세기~통일신라 시대이며, 분포상에서 정형성을 찾을 수 없을 뿐 아니라 지역적으로 백제의 영향을 받기 힘든 곳도 있다. 이에 반해 성벽은 전형적인 신라 산성 및 통일 신라 시대의 축조 수법이므로 유독 성문만 백제의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는 없다. 따라서 호형을 이루는 성문은 백제 산성만의 특징으로 보기는 어렵고, 극히 이례적이기는 하지만 신라 산성에도 설치되었으며, 가야 소국의 석축 기술이 반영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형태]

1. 초축 문 터

초축 성문은 현문식으로 축조되었으며, 문루(門樓)는 설치하지 않았다. 성문의 규모는 길이[내벽과 외벽 간 거리]가 580㎝, 너비가 430㎝이다. 통로부는 바닥 시설을 조성하기 위해 잡석으로 다졌다. 북쪽 측벽은 4단 100㎝가 남아 있는데, 면석 사이의 공간이 많아 외벽보다 정연하지 않다. 문 터 북쪽 외측 벽은 둥글게 처리한 데 반해 남쪽 외측 벽은 유선형으로 부드러운 형태이므로 비대칭을 이룬다. 문 터의 외벽은 바른 층 쌓기를 하였는데, 가로 56㎝, 세로 25㎝ 크기의 장방형 석재와 가로 60㎝, 세로 16㎝ 크기의 세장방형 석재를 번갈아 사용하였다. 기단 보축(補築)은 생토층 위로 부정형 할석을 면 고름하여 4단~6단으로 쌓았는데, 잔존 높이는 100㎝~140㎝, 경사도는 60도이다. 보축 외부는 흙으로 다져서 보강하였다. 내벽은 가로 40㎝~80㎝, 세로 40㎝~60㎝가량의 장방형에 가깝게 다듬은 할석을 2단~5단 축조하였다. 상부는 가로 30㎝, 세로 25㎝가량의 석재를 방형에 가까운 형태로 다듬어 8단~9단 정도 허튼층쌓기를 하였다. 성석 사이의 빈틈은 잡석을 끼워 견고성을 높였으나 축조 수법은 외벽에 비해 조잡하다.

2. 수축 문 터

수축 성문은 초축 성문을 좁혀서 사용하였으며, 관련된 시설은 장군석과 외부의 ’ㄱ’ 자형 석축 등이다. 수축 성문의 규모는 너비[내벽과 외벽 간 거리]가 580㎝로 초축 성문과 같지만, 너비는 초축 성문보다 약 80㎝ 좁아진 350㎝ 정도이다. 장군석은 북쪽 측벽 최상단에 설치되었다. 통로부 북쪽 측벽은 장군석과 함께 일부 수축한 것으로 추정된다. 개석 4매가 성벽 진행 방향[북쪽]으로 길이 약 150㎝가량 남아 있다. 개석은 크기 80㎝~50㎝가량의 부정형 할석을 사용하였고, 고임석은 가로 40㎝, 세로 15㎝가량의 세장방형 할석을 사용하여 좌우로 3매씩 높이가 일정하게 눕혀 쌓았다. 바닥은 가로 55㎝, 세로 12㎝가량의 부정형 할석을 사용하여 바닥면이 수평하게 4매 시설하였다. ‘ㄱ’ 자형 석축은 문 터 남쪽 외측 벽에 연접하여 축조되었으며, 마치 조선 시대 읍성의 옹성(甕城)과 비슷한 형태이다. ‘ㄱ’ 자형 석축과 문 터 외벽 사이는 석재와 흙으로 다졌다. 이 석축은 문 터의 남쪽에서 성 외측[동쪽]으로 300㎝ 진행하다가 북쪽으로 꺾여 520㎝ 연장되는 구조이다. 남아 있는 규모는 높이가 약 165㎝, 너비가 약 200㎝이다. ‘ㄱ’ 자형 석축은 성외에서 성내로의 진입이 편하게 시설한 구조물로, 수축이 이루어지면서 현문식에서 평거식으로 변화한 것으로 추정된다.

[현황]

김해 양동산성은 1988년 12월 23일 경상남도 기념물 제91호로 지정되었다.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고시 제2021-141호 「문화재 지정[등록]번호 삭제 및 문화재명 표기 방식 변경 고시」에 따라 문화재 지정 번호는 삭제되었다. 소유자는 산림청이고, 관리자는 김해시청이다. 김해 양동산성의 성벽 일부 구간은 복원이 이루어졌으나, 나머지는 성벽이 붕괴된 상태로 관리되고 있다. 부분적으로 무너진 석재 사이에서 내벽이 보인다. 동문 터는 성벽과 함께 발굴 조사한 후 보존하고 있다. 출토 유물은 국립김해박물관에서 소장하여 관리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김해 양동산성은 6세기 중반에 축조된 퇴뫼식 석축 산성으로, 신라가 낙동강(洛東江) 서쪽 기슭으로 진출한 후 쌓은 초기 산성 가운데 하나이다. 김해 양동산성 동문 터는 두 차례의 수축이 이루어졌다. 초축 성문은 현문식으로, 외벽과 접하는 부분을 호형으로 축조하였다. 이러한 형태는 백제 산성의 특징으로 알려져 왔지만 신라 산성이 분명한 김해 양동산성에서 최초로 확인되었다. 또한, 수축 성문에서 확인된 추정 장군석은 우리나라 고대 산성에서는 거의 확인되지 않은 유구이다. 따라서 김해 양동산성 동문 터는 우리나라 고대 신라 산성 성문의 구조와 변천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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