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400673
한자 金得器
영어공식명칭 Kim Deuggi
이칭/별칭 구오(具五)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남도 김해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김강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49년연표보기 - 김득기 출생
몰년 시기/일시 1592년 4월 20일연표보기 - 김득기 사망
추모 시기/일시 1600년 - 김득기 첨지중추부사 추증
추모 시기/일시 1784년 - 김득기 송담사 배향
추모 시기/일시 1880년 - 김득기 호조참판 추증
출생지 김해부 거인리 - 경상남도 김해시 외동 지도보기
활동지 김해부 - 경상남도 김해시
묘소 김득기 묘소 - 경상남도 김해시 한림면 용덕리 지도보기
성격 의병
성별

[정의]

임진왜란 당시 경상남도 김해 지역에서 활동한 의병.

[가계]

김득기(金得器)[1549~1592]의 본관은 의성(義城)이고, 자는 구오(具五)이다. 증조할아버지는 동래부사를 지낸 김양증(金養曾)이고, 할아버지는 전랑(銓郞) 김억저(金億砠)이다. 아버지는 김삼성(金三省), 어머니는 판관을 지낸 신응정(申膺禎)의 딸이다. 김양증 때 충청도 문의현에서 김해부 거인리[현 경상남도 김해시 외동]로 이주하였다.

[활동 사항]

김득기는 김해부 거인리에서 태어났다.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에 이르렀지만, 관직에 뜻이 없어 고향에서 지내며 나라를 걱정하였다고 한다. 1592년 4월 17일 죽도에 왜선이 나타나고 불암으로 들이닥치자 왜변(倭變)을 알아차렸다. 김득기는 “급제한 것도 나라의 은혜인데, 몸을 온전히 하고 처자를 보전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러고는 아들 김간(金侃)에게 도포와 한 줌의 머리칼을 잘라주며, 나중에 어머니의 무덤에 합장하라고 부탁하였다.

김득기는 김해부사 서예원(徐禮元)이 동문을 맡기자, 수성장으로서 성을 지켰다. 이후 부사가 성을 지키기 어렵다고 도망가려 하자, “우리는 왕명이 있지 않아도 충의에 격분하여 도망하지 않는데, 그대는 조정의 봉강(封疆)에서 죽지 않고 벗어나려는 생각만 하는가”라고 하였다. 4월 19일 밤에 적이 허수아비를 성안으로 던지자, 성이 혼란에 빠졌다. 이때 서예원이 북문을 열고 달아났고, 인심은 더욱 두려워하였다. 김득기는 군사를 거두어 항거하였지만, 화살이 떨어져서 역부족이었다. 4월 20일 적이 보리를 베어 성 주위의 구덩이를 메우고 들어오자 함락될 때까지 싸우다 순절하였다.

[묘소]

김득기의 무덤은 경상남도 김해시 한림면 용덕리에 있다. 1595년 김득기의 아내가 죽은 후 김득기의 옷과 머리털을 합장하였다고 전한다.

[상훈과 추모]

김득기는 1600년에 첨지중추부사, 1871년에 호조참판에 추증되었다. 1784년 송빈, 이대형과 함께 송담서원에 배향되었고, 1871년에는 사충단에 배향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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