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400674
한자 柳湜
영어공식명칭 Ryu Sik
이칭/별칭 낙오처사(樂吾處士)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남도 김해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김강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52년연표보기 - 류식 출생
몰년 시기/일시 1592년 4월 20일연표보기 - 류식 사망
추모 시기/일시 1600년 - 류식 병조참의 추증
추모 시기/일시 1871년 - 류식 이조참판 추증
추모 시기/일시 1871년 - 류식 사충단 배향
출생지 하동면 산산 - 경상남도 김해시 대동면 예안리 마산마을지도보기
활동지 김해부 - 경상남도 김해시
묘소 류식 묘소 - 부산광역시 강서구 녹산동 미음마을
성격 의병
성별

[정의]

임진왜란 당시 경상남도 김해 출신의 의병.

[가계]

류식(柳湜)[1552~1592]의 본관은 문화(文化)이다. 고조할아버지는 안양공(安襄公) 류수(柳洙), 증조할아버지는 도호부사를 지낸 류백손(柳伯孫), 할아버지는 수군절도사를 지낸 류용(柳墉)이다. 류용 때부터 김해로 이주하여 살았다. 아버지는 경산현령을 지낸 류서종(柳緖宗)이고, 어머니는 연안 김씨 김희수(金喜秀)의 딸이다. 부인은 상주 김씨로 목사 김명윤(金明胤)의 딸이다.

[활동 사항]

류식은 1552년 하동면 산산[현 경상남도 김해시 대동면 예안리 마산마을]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과거 공부를 하기도 하였지만, 벼슬의 뜻을 버리고 ‘낙오처사(樂吾處士)’라고 불렸다. 임진왜란으로 왜군이 월당진[현 경상남도 김해시 대동면 월촌리]으로 쳐들어오자, 류식은 “우리 집안이 대대로 나라의 은혜를 입었는데, 앉아서 욕을 당하기를 기다리겠는가”라고 하며 집을 나섰다. 큰형 어모장군 류진(柳津)이 노비 수십 명을 내어주자, 집안 사람들과 노비를 이끌고 김해성으로 들어갔다.

류식송빈 등과 성을 사수할 계획을 마련하고 대중을 깨우쳐 두려워 말라고 하였다. 왜군이 호계천 상류를 막아서 성안에 물이 끊기자, 성안 사람들이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항복하자고 하였다. 류식이 사람들을 꾸짖고 객관 앞의 땅을 파자 샘물이 솟아났다. 솟아난 샘물을 들어 왜군에게 보이자, 왜군은 신과 같은 사람이 반드시 성안에 있을 것이라면서 두려워하였다고 한다. 이때 판 우물을 ‘유공정(柳公井)’이라고 불렀다.

1592년 4월 20일, 적이 들판의 보리를 베어 성 주위의 구덩이를 메우고 성안으로 들이닥쳤다. 류식은 짧은 칼로 적을 베고, 전패(殿牌) 앞에서 적을 꾸짖으며 싸우다가 순절하였다.

[묘소]

류식의 옷과 신발을 임진왜란김해부의 남쪽 대야면 수참산[현 부산광역시 강서구 녹산동 미음마을]에 장례 지냈다.

[상훈과 추모]

류식은 1600년에 통정대부 병조참의에 추증되었고, 1871년에는 다시 이조참판으로 추증되었다. 김해성 안 우물을 팠던 자리에 후손들이 유공정비(柳公井碑)를 세웠는데, 비문은 주사(主事) 김종대(金鍾大)가 썼다. 김해부사 정현석이 삼충사(三忠祠)에서 류식이 빠진 것을 보고, 관찰사에게 보고하여 1871년 사충단을 설립하면서 배향되었다. 매년 4월 20일 제사를 지내고 있다. 류식의 아내도 류식의 변고를 듣고 순절하였는데, 정부인으로 정려를 받았다. 부인은 김해부의 동쪽 자산[현 경상남도 김해시 대동면 예안리 마산]에 묻혔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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