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400680
한자 審希
이칭/별칭 법응대사(法膺大師),진경대사(眞鏡大師),봉림대사(鳳林大師)
분야 종교/불교,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종교인
지역 경상남도 김해시
시대 고대/남북국 시대/통일 신라
집필자 배상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855년연표보기 - 심희 출생
출가|서품 시기/일시 863년 - 심희 출가
활동 시기/일시 918년 - 심희 경주 방문 설법
몰년 시기/일시 923년연표보기 - 심희 사망
추모 시기/일시 924년 - 창원 봉림사지 진경대사탑비 건립
학교|수학지 고달사 - 경기도 여주시 북내면
성격 승려
성별
대표 경력 국사

[정의]

남북국 시대 경상남도 김해 지역에서 활동한 승려.

[활동 사항]

심희(審希)[855~923]는 창원 봉림사지 진경대사탑비에 따르면, 가야계[임나(任那)] 왕족으로, 먼 조상이 흥무대왕(興武大王)[김유신]이라 한다. 863년에 혜목산에 가서 원감대사(圓鑑大師) 현욱(玄昱)의 제자가 되었다. 868년(경문왕 8) 스승의 인가를 받고, 전국 각지를 돌며 운수(雲水) 수행하였다. 운수기(雲水期) 심희는 반신라 정서가 팽배한 광주(光州)·설악(雪岳)·명주(溟州) 등에 머물기도 하며, 신라 진성왕의 부름에 응하지 않는 등 경계인의 모습을 보였다.

심희가 가는 곳에는 수많은 선승이 모여들었으며, 머물렀던 지역은 “주변 1,000리가 또 편안하였고 한 지방이 변화하였다”라고 한다. 순력(巡歷) 활동을 마친 후 김해 서쪽에 복림(福林)이 있다는 말을 듣고 작은 절을 고쳐 지어 머물며 ‘봉림(鳳林)’이라 하였다. 심희의 활동은 봉림사를 개창하면서 정점을 찍었다. 김해 지역 유력가 김인광(金仁匡), 김율희(金律熙) 등은 심희의 강력한 후원자였다. 신라 효공왕과 경명왕의 귀의를 받고, 918년(경명왕 2)에는 경주를 방문하여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편안히 하는 방편[理國安民之術]’을 설하기도 하였다. 심희가 봉림사에 머무는 동안 소속된 승려가 봉림대사(鳳林大師) 또는 봉림가자(鳳林家子)로 불리는 등 봉림산문(鳳林山門)을 이루었다. 923년(경명왕 7) 봉림사 봉림선당(鳳林禪堂)에서 사망하였다. 제자로는 경질(景質), 찬유(璨幽), 홍준(洪俊), 충담(忠湛) 등이 있다.

[사상과 저술]

심희는 당대 대부분의 선승과 마찬가지로 독자적 저술을 남기지는 않았다. 하지만 창원 봉림사지 진경대사탑비를 통해 심희의 사상을 일부 엿볼 수 있다. 심희는 당면한 현실과 실천을 중시하였으며, 자신이 파악한 진리가 세상에서도 펼쳐지기를 바랐다. 심희의 사상은 ‘공(空)’ 일변도에 치우치지 않았으며, ‘중도(中道)’를 강조하였다. 평소 제자들에게 ‘처(處)’하는 곳에 구애됨이 없이 ‘자재(自在)’할 것을 권고한 것에서도 심희 사상의 일단을 엿볼 수 있다.

[묘소]

심희의 사후 승탑인 보월능공지탑(寶月凌空之塔)[창원 봉림사지 진경대사탑]이 봉림사 경내에 세워졌다. 신라 경명왕(景明王)이 직접 탑비의 비문을 찬(撰)하였다. 탑과 탑비 모두 1919년 조선총독부가 경복궁으로 옮겼으며,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 야외 전시장에 있다.

[상훈과 추모]

심희는 신라 왕실이 국사로 예우하였고, 사망하자 진경대사(眞鏡大師)라는 시호를 추증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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