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40078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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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裵聖斗 |
이칭/별칭 | 배영업(裵永業) |
분야 | 종교/기독교,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종교인 |
지역 | 경상남도 김해시 |
시대 | 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배병욱 |
출생 시기/일시 | 1840년 - 배성두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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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898년 - 배성두 김해읍교회 설립 |
활동 시기/일시 | 1909년 4월 10일 - 배성두 합성학교 설립 |
활동 시기/일시 | 1912년 - 배성두 김해교회 초대 장로 취임 |
몰년 시기/일시 | 1922년 5월 - 배성두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2012년 6월 10일 - ‘김해교회 설립 표지석’ 건립 |
출생지 | 경상남도 김해시 동상동 |
활동지 | 배성두의 약방 - 경상남도 김해시 동상동 981 |
성격 | 종교인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김해교회 초대 장로 |
[정의]
개항기~일제 강점기 경상남도 김해 출신의 종교인.
[개설]
배성두(裵聖斗)[1840~1922]는 1840년 지금의 경상남도 김해시 동상동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배영업(裵永業)이고, 기독교 세례를 받고 ‘배성두’로 개명하였다. 할아버지는 배수우, 아버지는 배광국(裵光國)이다. 배수우는 1801년 천주교 박해를 피해 도피하던 중 사망하였고, 배광국(裵光國)은 김해에 정착한 후 의술을 배워 약방을 운영하였다. 배성두의 아들 배동석(裵東奭)은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학생으로 1919년 서울에서 3·1운동에 참여하여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활동 사항]
배성두는 아버지의 약방을 물려받아 운영하고 있었는데, 1893년 서양 문화에 궁금증을 갖고 스스로 부산에서 선교하던 선교사 윌리엄 베어드(William Baird)[배위량, 1862~1931]를 찾아가 기독교인이 되었다. 배성두는 베어드에게 기독교 서적을 구입하였고, 김해에 올 일이 있으면 자신을 찾아와 달라고 부탁하였다. 배성두는 자신의 약방에서 신도 10여 명과 함께 정기적으로 기독교 모임을 개최하였는데, 이 모임이 1898년 김해읍교회의 성립으로 이어졌다. 현재 김해교회의 모체이다.
배성두는 김해 지역 기독교의 자발적 수용에 핵심적 역할을 하였고, 정식으로 목사가 부임하기 전까지 신앙 공동체를 이끌었다. 1909년 4월 10일에는 합성학교[현 김해합성초등학교]를 설립하여 교육 사업에 헌신하였고, 1912년에는 김해교회의 첫 장로가 되었다. 1922년 5월에 사망하였으며, 5월 16일 김해교회장으로 장례를 치렀다.
[묘소]
배성두의 무덤은 경상남도 김해시 동상동 산에 있었으나, 2014년 후손들이 사는 미국으로 옮겨졌다.
[상훈과 추모]
김해교회 내에 ‘김해교회 설립 표지석’이 있다. 설립자 배성두에 대하여 “김해에서 약방을 하던 배성두 장로가 … 김해시 동상동 981번지 본가에서 교회를 시작하여 복음을 전하며 어려운 이웃을 돕고 섬기는 데 앞장섰다. 1907년 김해 합성학교를 세워 많은 인재를 육성하여 근대화 발전에 초석을 놓고 애국운동에 힘을 다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