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4012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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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民俗- |
분야 | 생활·민속/민속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남도 김해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성진석 |
[정의]
경상남도 김해 지역에서 전해 내려오는 주민들의 생활과 습관을 반영한 전통 놀이.
[개설]
민속놀이는 오래전부터 전승되어 온 민족의 전통 놀이로서 그 연원을 정확하게 확정 짓기는 어렵다. 그 이유는 기록으로 전승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로부터 주로 서민층에서 명절이나 혹은 특별한 일이 있을 경우에 예식의 하나로서 여흥을 돋우고자 행하여졌다. 김해 지역의 민속놀이 역시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오랜 세월 전승되어 오면서 세시 풍속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또한 기존의 것들이 시대가 변하면서 변이 과정을 거쳐 오늘날에 이른 것도 있다. 현재 복원되어 전승되고 있는 김해 지역 대부분의 민속놀이도 비교적 후대에 기록으로 정착되었거나 구전되어 온 것들을 복원하여 계승하는 것이기 때문에 완전한 원형이라고 정의할 수 없다. 그럼에도 설·정월 대보름·단오와 같은 명절에 맞추어 노는 놀이는 일부 전승되고 있다.
[중요 민속놀이]
1. 삼정동 걸립치기
삼정동 걸립치기는 김해시 삼정동에서 전승되어 온 지신밟기를 말한다. 여느 지신밟기처럼 삼정동 걸립치기도 정월 대보름에 행해지는 의례에서 비롯된 것으로 마을 잔칫날, 해치날에도 걸립치기를 하면서 즐겼다고 한다. 당산제를 시작으로 하여 집집마다 돌면서 집안의 태평을 빌고 액을 쫓는 것이 걸립치기 절차의 기본이며, 제의의 본질인 오래된 질서를 보내고 새로운 질서를 맞이하는 의례를 행하는 것이 걸립치기의 목적이다. 삼정동 걸립치기는 기수, 잽이[앞치배], 잡색[뒷치배]으로 걸립패가 구성된다.
원래 걸립치기를 완판으로 놀려면 약 3시간 정도의 시간이 걸리나 요즘은 약식으로 1시간 내외로 주로 논다. 삼정동 걸립치기 사설과 연희 순서는 당산제, 마을샘굿[용왕굿], 마당돌이, 성주굿, 조왕굿, 용왕굿[집 안], 장독굿, 고방굿, 외양간굿, 뒷간굿, 거리굿[물림굿] 등으로 구성되어 있고 놀 때마다 거리별로 노는 시간이 다를 수 있으며, 걸립치는 집안 사정에 따라 한두 굿거리[순서]가 빠지기도 하지만 보통은 이 순서를 지키면서 걸립을 치며 논다.
삼정동 걸립치기는 1920년을 전후로 광복 시기까지 상쇠인 유상진을 중심으로 지속적으로 행해졌다. 이후 정치봉이 상쇠를 물려받고 1984년까지 이끌었지만, 정치봉의 은퇴 후 쇠락의 길을 걸었으나 보존의 필요성이 제기되면서 류명식 등의 주도로 1997년에 활천농악단으로 단체를 만들게 되었다. 이어서 1998년 양만근이 중심이 되어 삼정동 걸립치기 보존회를 결성하여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2. 석전놀이
석전놀이는 김해 지역에서 편을 나눠 돌을 던져 승부를 겨루는 집단 민속놀이로 오늘날에도 전승되고 있다. 석전놀이의 최초 근원은 알 수 없지만, 원시 시대 부족들이 적으로부터 자신들의 방어 목적으로 돌을 무기로 사용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의 기록에 보면 김해 지방에서는 매년 음력 4월 초파일 경부터 마을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성(城)의 남쪽 지역에서 온 마을 사람들이 좌부(左部), 우부(右部)로 나누어 편을 가르고 깃발을 세우고 북을 치며 기상을 돋우고 돌을 던져 상대편을 공격하는데 마치 돌비[石雨]가 오는 것 같았다고 한다. 사상자가 생겨도 승부가 가려질 때까지 싸웠다고 하며 음력 5월 단옷날에 그 절정을 이루었다고 한다.
현재 김해 석전놀이는 크게 기원, 흥, 상생, 화합의 4개 주제로 총 8마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기원’ 속에는 1마당 ‘석전 전야’가 있으며, ‘흥’ 속에는 2마당 ‘힘겨루기’, 3마당 ‘사또 행차’로 구성되고, ‘상생’ 주제 속에 4마당 ‘전열 정비’, 5마당 ‘석투전’, 6마당 ‘종전’으로, 마지막 ‘화합’의 주제 속에 7마당 ‘대동단결’과 8마당 ‘퇴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석전놀이는 김해의 전통 민속놀이로 이어져 왔으나 일제 강점기 금지되었다가 1984년 당시 김해문화원 류필현 원장이 유년기에 김해 해반천 변에서 보았던 기억을 토대로 놀이를 복원하였다. 그리고 김해농업고등학교 김충곤 교장과 상의하여 학생들에게 경상남도 무형유산[한량무] 김덕명의 지도로 300여 명 학생을 좌부, 우부로 편성하여 지도하므로 최초의 김해 석전놀이의 복원이 이루어졌다. 이후, 가락문화축제의 가장행렬에 동참하였고, 보존회를 결성하게 되었다. 그러나 많은 인력 동원과 예산 문제로 인해 일회성 행사에 그쳤다가 2008년 새로운 중흥기를 맞으면서 원형 그대로 복원한 김해 석전놀이는 그 진가를 발휘하기 시작한다. 복원 1년 만인 2009년에는 경상남도 대회에 출전해 최우수상을 차지하였다. 2010년에는 경상남도 대표로 충청남도 공주시에서 개최한 한국민속예술축제에 참가해 은상을 수상하였다.
3. 김해 큰줄땡기기
김해 줄땡기기는 정월 대보름의 보편적인 의례로서 대부분의 마을에서 행해져 왔던 ‘줄당기기’ 놀이다. 김해 큰줄땡기기는 지역에 따라 조금의 차이를 보이지만 대개 서로 편을 나누어 짚으로 만든 줄을 당기며 마을의 태평과 풍년을 기원하는 세시 풍속 놀이다. 놀이 도구는 볏짚으로 새끼줄을 꼬아서 큰 줄을 만드는데 그 길이가 100m 정도 된다. 큰줄땡기기는 줄이 길고 사람이 많아 마을의 넓고 평평한 공간에서 진행된다. 그리고 읍내에서는 시장통 혹은 종로에서 개최하다가 1930년대에는 새로 개설된 읍내 이동 도로에서 열린다.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여서 두 편으로 나누는데, 마을의 특성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대개 서부[수줄]와 동부[암줄]로, 산쪽과 아래쪽, 여자와 남자로 나누어 줄을 당겨 승부를 겨룬다. 현재는 기존 김해읍의 좌부·우부를 김해시 전역으로 확대해 좌부는 생림면, 상동면, 대동면, 동상동, 부원동, 회현동, 북부동, 삼안동, 활천동, 불암동이 포함되고, 우부는 진영읍, 주촌면, 진례면, 한림면, 내외동, 칠산서부동, 장유1동, 장유2동, 장유3동을 포함하여 행사를 치른다.
역사적 원형은 수로왕 신화 『삼국유사(三國遺事)』「가락국기(駕洛國記)」에 ‘자줏빛 줄이 하늘에서 땅으로 드리워지면서 땅으로 내려왔는데……’라는 내용은 줄의 의례적 기능을 보여 준다. 수로왕 신화 이후 김해 줄땡기기의 기록은 이학규(李學逵)의 「금관기속시(金官紀俗詩)」에 ‘색전(索戰)’이라는 시구와 김해부의 발하희(拔河戱)에 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색전과 발하희는 줄땡기기를 지칭하는 말이다.
김해 큰줄땡기기의 기원은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지만, 조선 시대 후기까지 옥골방천에서 정월 대보름에 행해졌다고 전하고 있다. 1962년 제1회 가락문화제에서 재현하였으나, 1964년 제3회 가락문화제를 마지막으로 중단되었다. 이후 1999년 제23회 가락문화제 때 재현했으나, 다시 중단되었으며, 가락문화제 개최 30주년인 2006년부터 부활해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4. 태종산 칠석희
김해시 진영읍 태종산(太宗山)에는 칠석희(七夕戱)가 전해지고 있다. 칠석희는 『여지도서(輿地圖書)』, 『김해부읍지』[1832], 『김해읍지』[1895] 등의 사료에 기록되어 있는데 대개 칠석희는 김해부의 알촌과 하계 두 마을 사람들이 매년 칠월 칠석에 깃대를 들고 북을 울리며 태종산에서 신께 제사를 지내고 내려와 씨름을 한 것을 말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호환이 있었다고 전한다.
태종산의 꼭대기에는 칠석제단이 있었다고 하며, 칠석제는 1990년대까지 김해시 진영읍 죽곡리에 있는 유목마을, 죽곡마을, 외촌마을 주민들이 칠월 칠석에 태종산의 포구나무에서 제사를 지냈다고 전한다. 제를 지내기 위해서 제관을 뽑는데 칠석제이므로 7명의 남자들을 선발하고 연령대는 50대 정도로 한정하였다. 제관들은 7일간 깨끗한 계곡물에서 목욕재계를 하며 언행을 삼가고, 타인과의 대화, 바깥출입을 가급적 삼가게 하였다. 칠성대는 약 5미터 정도 되는 대나무의 끝에 오색천을 매달아 제작하였다. 마을 주민들은 칠월 칠석날 풍물 소리를 듣고 제관들이 제를 지내러 가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칠성대의 오색천을 바라보는 형식으로 제의에 참여하였다. 제사의 절차, 방법 그리고 제물 마련 방법 등을 기록한 문서가 마을에 전해져 왔으나 제의가 없어지면서 불에 태웠다고 한다. 현재 태종산 칠석희는 기록이나 구전으로만 남아 있다.
5. 진례 신월농악
진례 신월농악은 김해시 진례면 신월리에서 전승되고 있는 농악이다. 여느 마을 농악과 마찬가지로 진례 신월농악도 일제 강점 시기에는 그 맥을 잊지 못하다가 광복 이후에 전국농악대회를 기점으로 복원되어 현재까지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광복 이후 1946년 상쇠 심일문이 시점이 되어 3대 상쇠 심재수[심일문의 아들]로 이어지게 되었고 전통성을 계승·보존하려는 의지가 강하였다. 이후 2010년 김해민속예술보존회의 분과 단체로서 김해농악보존회를 결성하게 되었다. 김해농악보존회는 진례 신월농악을 기반으로 하여 김해 지역의 농악 발굴, 보존과 각종 경연 대회에 참여하고 있다.
풍물은 상쇠, 종쇠, 장구, 북, 징, 벅구[농악에 쓰는 작은 북]와 잡색[가장(假裝)을 하고 농악대에 가담하여 섞여 놀이를 펼치는 연행자]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굿은 ‘길놀이[개고랑굿], 당산굿, 문굿, 성주굿, 마당굿’으로 구성되어 있다. 길놀이는 정월 대보름 전날 마을을 돌면서 길굿을 하는 것이다. 당산굿은 집집마다 지신밟기를 하기 전 당산나무에서 고사를 지내고 굿을 하는 것을 말한다. 문굿은 굿을 하게 되는 집 앞에서 “주인 주인 문 여소! 나그네 손님 들어가요!”라는 말을 외치면서 굿패들의 도착을 알리는 절차이다. 이 때 주인이 대문을 활짝 열고 굿패를 맞이하고 지신밟기가 시작된다. 성주굿은 기를 들고 있는 사람을 필두로 마당에 들어서면 성주 앞에 자리를 깔고 고사상을 차리고 맞이하는 것으로 시작되며, 집안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한다. 마당굿의 소리꾼과 악사가 굿을 하며 구경꾼이 함께 춤을 추고 논다. 이것으로 한 집의 지신밟기를 마무리한다.
진례 신월농악은 성주굿에 특징이 있는데, 여느 성주굿 사설은 2소절 단위로 전개되지만 진례 신월농악 성주굿은 1소절 단위로 전개된다. 이러한 방식은 굿의 흐름을 더 빠르게 전개하기 때문에 굿을 박진감 있고 힘차게 함으로써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효과가 있다. 또한 고사소리도 특유의 사투리로 표현되기 때문에 토속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정월 대보름 지신밟기에서 비롯된 진례 신월농악은 지신밟기를 통해 묵은 질서를 돌려보내고 새 질서를 받아들이는 민족 고유의 의례적 행위이자 놀이이다. 매년 정기 공연을 개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