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401332
영어공식명칭 kiln site
이칭/별칭 도요지,요지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남도 김해시
시대 고대/삼국 시대,고려/고려 전기,고려/고려 후기,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최영문

[정의]

경상남도 김해 지역에서 흙에 열을 가하여 기물을 굽기 위해 축조한 가마가 있었던 터.

[개설]

가마란 기물(器物)을 굽기 위해 축조한 구조물로, 다양한 종류의 토기·도기·자기·벽돌·기와 등을 가마를 이용하여 생산하였다. 가마는 한데 시설에서 시작하여 점차 불을 다루는 기술이 발전하면서, 구덩이를 파서 만든 수혈식 가마→지하식 가마→반지하식 가마→지상식 가마로 변화하였다. 발굴 조사된 가마터에서는 기물의 파편과 가마의 벽체, 그리고 가마 안에서 사용하였던 도구들이 확인되는데, 이를 통해 당시 가마의 구조와 제작 기술, 각종 기물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2000년대 이후 김해 지역에서는 가마터에 대한 발굴이 많이 이루어졌다. 그 결과, 이른 시기의 토기 가마터를 비롯하여 고려 시대의 청자 가마터, 조선 시대의 옹기 가마터, 백자 가마터와 건축 재료 등을 만들었던 가마터 등이 확인되었다.

[토기 가마터]

2023년 현재까지 김해 지역에서 발굴된 토기 가마 유적은 모두 여덟 곳인데, 가마의 운영 시기는 기원전 1세기부터 기원후 8세기까지 다양하게 확인되었다. 대표적인 가마터는, 첫 번째로 김해시 대성동 203번지에 있는 ‘대성동 토기 가마터’이다. 1994년~1995년에 발굴하였는데, 구덩이와 불을 뗀 흔적, 도로 등이 조사되었다. 불을 뗀 흔적은 일반적으로 정형화된 가마의 개념과는 차이가 있으나, 열이 가해진 흔적이 있는 바닥과 실패품으로 추정되는 토기 조각 등으로 볼 때 기원전 1세기 말~기원후 1세기 초에 운영된 것이다. 기원을 전후한 시기 김해시 대성동 일대의 토기 생산과 유통 과정을 살필 수 있는 기초 자료가 된다. 두 번째는 김해시 봉황동 133번지에 위치한 ‘봉황동 토기 가마터’인데, 4기의 가마를 확인하였다. 연질(軟質)의 단지와 토기 손잡이 등이 출토되었는데, 가마의 운영 시기는 3세기 후반~4세기 전반이다. 가마터는 금관가야 읍락의 중심지에 위치하고 있어 김해 대성동 고분군(金海 大成洞 古墳群)과 함께 당시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세 번째는 김해시 진례면 송현리 산120번에 자리한 ‘송현리 토기 가마터’인데, 가마 1기와 화덕 자리[노지(爐址)] 2기 등의 생산 유적이 조사되었다. 적갈색 연질의 굽다리 접시와 항아리를 비롯한 각종 토기 조각, 일부 회청색 경질(硬質) 토기 뚜껑, 굽다리 접시 조각 등이 조사되었는데, 가마의 조업 시기는 5세기~6세기이다. 가마터 주변으로 삼국 시대의 고분군이 집결해 있어 이 지역 일대의 토기 생산과 유통 관계를 추정할 수 있다. 네 번째는 김해시 진례면 시례리 산52번지에 위치한 ‘시례리 토기 가마터’인데, 삼국 시대의 토기 가마 5기가 확인되었다. 가마 내부에서는 굽다리 접시·뚜껑·단지·짧은 목 항아리 등이 출토되었다. 가장 많이 출토된 짧은 다리 굽다리 접시는 4세기 중반~5세기 초에 생산된 유형으로, 가야 지역의 독특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기와 가마터]

기와 가마 유적도 여덟 곳에서 확인되었다. 고려 시대의 가마터 세 곳과 조선 시대의 가마터 다섯 곳이다. 고려 시대의 기와 가마는 고려 전기에 운영되었고, 조선 시대의 기와 가마는 조선 전 시기에 걸쳐 운영되었다.

김해시 진례면 시례리한림면 병동리에서 확인된 고려 시대의 기와 가마는 모두 11세기~12세기에 제한적으로 운영되었다. 조사 결과 어골문·사격자문·방격문 등이 새겨진 기와가 확인되었다. 장유동 기와 가마 유적에서는 ‘신문초(新文草)’이 새겨진 명문 기와가 출토되었는데, 기와의 공급처 또는 수요처를 기록한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시대의 가마는 김해시 장유면 대청리[현 김해시 대청동]와 상동면 여차리, 삼문동, 동상동, 대성동 등 다양한 곳에서 확인되었다. 조선 시대는 고려 시대에 비해 기와 제작에서 실용성이 우선적으로 요구되었으며, 민간 수요가 증가하였기 때문에 고려 시대보다 기와 가마의 운영이 보편화되었다.

[청자 가마터]

김해 지역에서는 생림면 봉림리에서 발굴된 것이 유일한 청자 가마터이다. 출토 유물은 대접과 접시, 잔 등 생활 용기가 대부분이며, 문양도 단순화·간략화되어 있는 것이 대부분 14세기에 나타나는 특징이다. 이러한 특징은 강진 사당리 10호 가마, 예천 황지리 가마, 무안 도리포 유적 등과 유사하다. 고려 시대 청자는 한반도 서남해안 일대에서 생산되었는데, 13세기 몽골의 침입으로 자기소(瓷器所) 시스템이 붕괴되면서 자기소에 속하였던 장인들도 전국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그 결과 14세기가 되면 청자 가마터가 경상권에서도 확인되는데, 김해 지역에서도 이전 시기와 달리 청자 가마터가 조사되었다. 이외에 14세기 말~15세기 후반이 되면 김해 지역에서 분청사기가 생산되는데, 경상남도 기념물로 지정된 김해 상동 분청사기 가마터가 대표적인 유적이다.

[분청사기 가마터]

김해 상동 분청사기 가마터에서 조사된 가마와 폐기장에서 다량의 분청사기들이 확인되었다. 특히 ‘사선(司膳)’, ‘장흥(長興)’, ‘김해(金海)’, ‘공(公)’, ‘용(用)’이 상감된 관사명 명문 자기들이 다수 확인되고 있어, 김해 상동 분청사기 가마터에서 제작된 그릇들의 사용처를 가늠할 수 있다. 또한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김해도호부(金海都護府)의 동쪽, 하품을 생산하던 감물야촌(甘勿也村)에 1개의 자기소가 있었다”라는 기록과 『경상도속찬지리지(慶尙道續撰地理誌)』에 “자기소는 부의 동쪽 감물야(甘勿也)에서 하품을 생산하였다”라는 기록이 남아 있는데, 이를 통해 현재의 ‘대감야(大甘也)’라는 지명이 ‘대감물야리(大甘勿也里)’가 축약되어 생긴 지명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이 지역이 『경상도속찬지리』가 제작되었던 당시 1424년~1432년, 1469년에 김해도호부 치소[현재 김해시 동상동]에서 북동쪽에 위치하였다는 점, 그리고 조사 지역의 고고학적 조사 성과들을 종합적으로 검토하였을 때, 이 일대가 조선 시대 ‘감물야촌’이라는 공납 자기소로 비정되고 있어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받는다.

[백자 가마터]

백자 가마터도 김해시 상동면 대감리에 위치하는데, 김해 상동 분청사기 가마터에서 남쪽으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상동 백자 가마터와 묵방리 백자 가마터가 조사되었다. 두 유적의 운영 시기는 모두 17세기인데, 특히 상동 백자 가마터에서는 4만 5000여 점의 유물이 확인되었다. 상동 유적에서는 3기의 가마가 조사되었는데, 기종(器種)은 주로 바리·접시·잔 등이 출토되었고, 화문·초문·한글 등을 새긴 철화 백자 조각과 제기 등의 특수 용기도 함께 확인되었다. 3기의 가마를 동시에 운영하면서 여러 종류의 많은 백자를 생산하였던 곳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상동 백자 가마터는 분청사기 가마터와 함께 문헌 기록상에 존재하는 ‘김해다완’의 생산지와 김해 출신 백파선(百波仙)의 흔적을 찾을 계기를 마련해 주는 중요한 장소이다.

한편, 2023년 11월 동아세아문화재연구원에서 조사한 김해 상동 묵방리 10번지 백자 가마터에서는 백자 가마 2기와 소성 유구 1기, 공방 터 1기, 수비공 6기, 수혈 7기, 폐기장 3개소가 확인되었으며, 유물은 약 2만여 점이 발굴되었다. 불순물을 걸러 내는 ‘수비공’부터 실패한 것을 버리는 ‘폐기장’까지 도자기 제작에 관련한 모든 공정이 확인되었는데, 이러한 유적은 김해 상동 묵방리 10번지 백자 가마터가 처음이다. 운영 시기는 임진왜란 이후인 17세기 전반~17세기 중반으로 추정되며, 김해 상동면의 대규모 요업 단지 중앙부에 위치하고 있다.

[옹기 가마터]

옹기 가마터는 김해시 한림면 안하리에서 유일하게 조사되었다. 확인된 옹기는 항아리 8점, 동이 7점, 단지 1점, 병 1점, 주구 항아리 1점 등이다. 출토 유물의 기종과 단면 형태 등을 통해서 볼 때, 조선 전기 유적인 사천 우천리 유적, 청도 순지리 유적의 출토품과 유사하다. 함께 출토된 분청사기와 백자의 연대를 고려한다면 안하리 옹기 가마의 운영 시기는 15세기~16세기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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