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4013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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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古 金海灣 |
영어공식명칭 | Gogimhaeman Bay |
분야 | 지리/자연 지리 |
유형 | 지명/자연 지명,지명/고지명 |
지역 | 경상남도 김해시 |
시대 | 선사/선사 |
집필자 | 안홍좌 |
[정의]
경상남도 김해 지역에 있었던 선사 시대 만.
[개설]
현재 김해 시가지는 내륙에 위치하고 있으나, 대부분 저지대에 속하는 충적 평야에 해당한다. 홀로세[약 1만 년 전부터] 고해면기에는 현재보다 7~8m 정도 높았을 것으로 추정되므로, 현재 김해 시가지 인근까지 만이 형성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과거 김해시 대저면과 가락면은 고 김해만에 속했던 지역이다. 이후 저습지를 거쳐 현재 충적 평야 지역이 되었다.
[명칭 유래]
선사 시대 현재 김해평야에 존재했던 만이라 ‘옛 고’[古]를 지명인 김해(金海) 앞에 붙이고, 현재 해안선에 비해 내륙으로 들어온 지형이라 만(灣)을 붙여 사용한다. 김해를 비롯해 낙동강 하류 지역의 패총에서 바다에서 서식하는 조개가 많이 확인되면서 연구자들에 의해 지칭되기 시작하였다. 김해는 ‘쇠 금’[金]과 ‘바다 해’[海]가 합쳐진 이름으로, 김해의 가락국이 신라에 통합된 이후 금관군이 되었다가 757년(경덕왕 16) 김해소경(金海小京)으로 개칭되면서 처음으로 ‘김해’가 확인된다.
[자연환경]
김해시 장유면 수가리[지금의 부산광역시 강서구 범방동] 김해 수가리 조개더미에서 발견된 고 김해만의 조개더미는 신석기 시대 김해 사람들이 먹고 버렸던 생활 쓰레기의 흔적이다. 출토된 40여 종의 조가비들이 대부분 바다에서 채집되는 것으로 현재 김해평야가 고 김해만이었다는 증거로 볼 수 있다. 식생의 분석을 통해 보면, 김해 율하 지역은 3,940~3,370년 전부터 인간에 의한 벌채가 시작되었으며, 3,370~2,300년 전 농경이 본격화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울산, 포항 지역이 대부분 2,400~2,000년 전 인간의 활동이 본격화된 것 비해, 이른 시기부터 인간이 살았고 김해 지역에서 가야의 문명이 꽃피운 데에는 만이라는 환경의 이점이 작용하였다고 추정할 수 있다.
[고 김해만과 가락국]
김해 수가리 조개더미를 비롯해 부산 가덕도 장항 유적, 영도 동삼동 패총, 통영 연대도 패총 등에서 흑요석과 흑요석으로 만든 도구들이 출토되었는데, 일본 규슈[九州] 북부 지역에서 생산된 것이다. 7,000년 전 김해 사람들이 바다를 통해 일본과 교류하였다는 증거로 볼 수 있다.
김해는 고대로부터 내륙과 해양의 물건들이 모여드는 유리한 입지 조건을 가진 곳으로 이를 바탕으로 김해에 가락국이 발달할 수 있었다. 「구지가(龜旨歌)」는 이를 잘 보여 주는 기록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가락국기(駕洛國記)」에 등장하는 「구지가」는 천신에게 기원하며 거북이를 위협하는 위협 주술의 노래이다. 이제까지 고대 기록을 보면, 고구려 동명성왕(東明聖王)이 산천신에게 기원할 때 산신의 사자인 흰 사슴을 괴롭히고, 백제가 천신에게 기원할 때는 천신의 사자인 매를 괴롭혔으며, 신라 순정공(純貞公)이 해신에게 잡혀간 부인을 돌려받기 위해 해신의 사자인 거북을 위협하였다. 이를 참고하면, 가락국의 「구지가」는 신과 사자가 어긋나 있다. 아마도 이는 김해 지역에 존재하고 있었던 해신에 대한 기원 노래가 수로왕의 등장으로 인해 천신으로 교체되면서 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를 보면, 「구지가」의 주요 등장 동물이 거북이라는 점에서 청동기 시대를 넘어 김해 가락국 등장 시기까지도 바다가 김해의 주요 관심사였음을 알 수 있다.
가야 시대 가락국의 중심지였던 김해 시가지 지역에 유적이 밀집해 있고, 해상 교통로와 직결된 외항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이는 율하동 일대에 당대 여러 유적들이 분포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관동동 유적에서 확인된 잔교 시설은 삼국 시대에 해양과 육지를 연결하는 매우 중요한 시설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다만, 이후 계속된 해안선의 후퇴와 낙동강의 퇴적으로 칠점, 명지 등 하중도가 생기고 육지화가 진행되면서, 고 김해만은 서서히 사라지고 낙동강의 하류로 탈바꿈되었다. 이어 일제 강점기 인공적인 간척과 개간이 이루어지며 김해평야가 되었다.
[현황]
김해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 김해평야를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된다. 김해평야는 원래 고 김해만으로 바다가 자리한 곳이었다. 그런데 일제 강점기에 일본이 바닷물의 유입을 막아 육지로 만들기 위해 낙동강 곳곳에 수문을 만들었다. 이때 만들어진 대표적인 수문이 녹산수문과 대저수문이다. 녹산수문은 1934년 4월에 완공되었는데 강과 바다를 가르는 우리나라 최초의 하굿둑 수문으로, 당시에는 김해시와 부산광역시로 연결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부산광역시[강서구 녹산동 성산마을]에 편입되었다. 같은 시기 완공된 대저수문은 현재 부산광역시 강서구 대저동과 김해시 대동면 사이에 있다. 녹산수문과 대저수문은 지금의 김해평야를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