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4000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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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海 大成洞 古墳群- 金官加耶- 王陵 |
영어공식명칭 | Daeseong-dong Ancient Tombs, Gimhae and Royal Tombs of Geumgwan Gaya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경상남도 김해시 |
시대 | 고대/삼국 시대/가야 |
집필자 | 이동희 |
[정의]
경상남도 김해시 대성동에 있는 금관가야 최고 지배층의 무덤들.
[개설]
김해 대성동 고분군은 가야의 건국 설화가 깃든 구지봉과 김해 봉황대 유적의 중간에 위치하는데, 동쪽으로 인접하여 수로왕릉이 있다. 김해 대성동 고분군은 김해시내 중심부를 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르는 해반천(海畔川)을 따라 형성된 ‘애구지’[애꼬지]라는 구릉과 주변 평지 일대에 걸쳐 조영된 금관가야의 최고 지배층의 무덤 유적이다. 현재 수릉원이 조성된 김해 대성동 고분군 남쪽 일대에도 원래는 대성동고분군과 이어져 있었지만 이 일대가 모두 삭평되어 그 양상을 알기 어렵다. 김해 대성동 고분군을 중심으로 가야 유적이 밀집 분포한다. 김해 대성동 고분군의 실제 범위는 기존에 국가 사적으로 지정된 범위보다 훨씬 넓게 분포한다. 즉, 현재의 고분군 남쪽에 위치한 구 공설운동장[현재의 수릉원]과 북쪽 도로 개설구간[구지로] 일대도 기존의 김해 대성동 고분군 구릉과 연결되고 있어 동일한 성격의 고분 유적임이 발굴 조사를 통해 밝혀졌으므로 모두 김해 대성동 고분군으로 포함되어야 한다. 수릉원 부지는 비록 구릉의 중앙 능선부가 모두 삭평되어 일부 사면부 및 평지만 남아 있어 전모를 알기 어렵지만 1~2세기대의 목관묘(木棺墓)를 비롯하여 5~7세기대의 고분이 발굴조사되었다. 공설운동장 조성 등으로 사라진 능선부에는 금관가야 당시의 지배층 고분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김해 대성동 고분군이 무덤 공간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기원후 1~2세기 대에 목관묘(木棺墓)가 구릉 아래 평지에 조영되기 시작한 시점부터이다. 3세기 이후에는 대성동 구릉 정상부를 중심으로 지배층의 묘역이 조영된다. 1980년대부터 당시 경성대학교 신경철 교수는 김해에서 금관가야 왕릉을 찾기 위해 심혈을 기울이던 중에 지역 주민들에게 ‘애구지’로 불리던 구릉을 주목하고 1990년 6월 이곳을 발굴조사하게 되었다. 대성동 고분군의 발굴은 구릉의 정상부를 중심으로 시작되어 2020년 8월까지 총 10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다. 1990년 1차 발굴조사 이후 유적의 중요성이 인정되어 1991년 1월 사적 제341호로 지정되었다. 현재까지 모두 200여기의 금관가야의 무덤과 청동기 시대 후기의 고인돌, 석개토광묘(石蓋土壙墓) 등이 발굴 조사되었다.
경성대학교 박물관에서 1990년부터 1992년까지 발굴 조사를 실시한 결과, 대성동 구릉 일대가 금관가야 지배자층의 집단 묘역으로 밝혀졌다. 입지 조건이 탁월한 구릉의 정상부에는 왕릉 및 최고 지배층의 무덤이, 사면부에는 상대적으로 신분이 낮은 사람들의 무덤들이 조영되었다. 구릉의 능선부에 조성된 대형 목곽묘(木槨墓)들은 그 규모나 부장품(副葬品)으로 미루어 3세기 후반부터 5세기대에 이르기까지 금관가야 최고 지배층의 무덤으로 밝혀졌고, 4세기대가 전성기였음을 알 수 있다. 구릉 상부의 대형 목곽묘(木槨墓)를 통해 중요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데. 먼저, 3세기 후엽에 최초로 사람을 순장(殉葬)하고, 기마용(騎馬用)의 철제 갑주(鐵製 甲冑), 마구류(馬具類), 북방 유목 민족적 묘제(墓制), 무기를 구부려 부장하는 습속, 도질토기(陶質土器), 오르도스형 동복[청동솥] 등 북방 유목 민족의 습속과 유물이 다량으로 출토된다는 점이다. 아울러, 통형 동기(筒形 銅器), 파형 동기(巴形 銅器), 벽옥제 석제품(碧玉製 石製品) 등 왜[고대 일본]와의 교섭 양상을 규명할 수 있는 자료가 출토되었다.
김해 대성동 고분군 구릉에서는 청동기 시대 후기의 고인돌과 조개더미 등이 조성되다가 1~2세기가 되면 목관묘(木棺墓)가 구릉 주변 평지에 분포하기 시작한다. 이후, 2세기 후반대에 목곽묘(木槨墓)가 처음 나타나고[주차장부지 1호분], 대성동 구릉의 북쪽 하단부에서 축조되기 시작한다. 목곽묘(木槨墓) 중 대형분들은 구릉 능선부를 따라 시기순으로 축조되는데 5세기 전반이 되면 구릉의 정상부에 위치한다. 5세기 후반에는 구릉의 남쪽으로 내려가다 다시 수릉원[구 공설운동장] 방향으로 지속적으로 축조된다.
[금관가야 최초의 왕릉으로 추정되는 대성동 29호분]
3세기 후엽에 해당하는 29호분은 부장공간(副葬空間)이 별도로 있으며, 판상철부(板狀鐵斧)들을 무덤 바닥에 깔아 시상(屍床)으로 삼고 순장(殉葬)을 처음으로 시행하고, 다량의 토기를 부장(副葬)하는 등 부(富)와 권력의 집중이 처음으로 확인된다. 특히, 주인공의 사체 아래에 91점의 판상철부(板狀鐵斧)를 배치하여 피장자(被葬者)의 위세를 극대화한 것이 주목된다. 29호분의 규모는 묘광(墓壙)의 추정 길이 960㎝, 너비 560㎝, 깊이 130㎝이고, 목곽(木槨)은 길이 640㎝, 너비 320㎝이다. 목곽(木槨)은 판재(板材)로 조립한 것으로 파악되고 그 내부는 동쪽,중앙부,서쪽 등으로 구분되어 유물이 매납(埋納)되었다. 서쪽에는 토기류를 동서 방향으로 6열, 남북 방향으로 8열이 되도록 열을 지어 배열하였다. 그리고, 철제 칼, 철제 화살촉, 철제 끌, 낚시바늘 등의 철기류가 토기 주변과 위에서 출토되었다. 남쪽 절반부에서는 청동솥[동복]을 중심으로 하여 그 주위에 철제 화살촉 및 철제 도끼류를 부장(副葬)하고, 방패 등을 부장(副葬)한 흔적도 확인되었다. 일정한 공간에 많은 토기를 매납(埋納)했음은 부곽(副槨)의 출현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이는 순장(殉葬)과 함께 사후 생활을 위하여 부장품(副葬品)을 미리 준비했음을 의미한다.
대성동 29호분은 가야 지역에 최초로 왕릉이 출현했음을 시사하는 것이고, 가야 왕릉이 금관가야에서 최초로 축조되었음을 보여준다. 대성동 29호묘는 고분군이 위치한 구릉의 북쪽 말단부에 위치하고, 이후 금관가야의 왕릉으로 추정되는 고분들은 그 위치가 북쪽에서 남쪽으로 점차 이동하는 특징을 보인다. 대성동 29호분 이후에 축조되는 대성동 13호 목곽묘 등 금관가야의 왕릉급 고분은 피장자(被葬者) 발치에 별도 묘광(墓壙)을 굴착하여 부장하는 이혈주부곽식(異穴主副槨式)으로 발전하여 김해식 목곽묘(木槨墓)의 형식으로 정형화된다. 고고학계에서는 대성동 29호분이 변한(弁韓) 단계의 구야국(狗倻國)이 소국(小國) 단계를 벗어나 규모가 더 커진 금관가야의 최초의 왕릉으로 평가되고 있다. 29호분을 발굴조사한 신경철 교수는 청동솥[동복] 등의 출토 유물에 근거하여 부여족이 남하하여 축조한 왕릉으로 파악하고 있다.
[금관가야 왕릉급 고분의 전개 과정]
가야권에서 가장 일찍 대형의 왕릉을 축조한 금관가야는 계속해서 목곽묘(木槨墓)로 왕릉이 축조되었고, 높은 봉분(封墳)은 확인되지 않는다. 김해 대성동 고분군은 여러 개의 소군집(小群集)으로 구분되는데, 소군집을 이루며 조영된 고분들 중에 각 군집의 중심부에 왕릉급의 대형묘가 위치하고, 그 주변에 배장묘(陪葬墓)로서 중소형 고분이 배치된 다음 1세기 정도 흐른 뒤에 이 왕릉들을 포함한 구역의 상위에 수직으로 중복되어 후대 고분이 축조되는 특징이 보인다. 현재까지 발굴조사된 김해 대성동 고분군의 왕릉급에 해당하는 고분은 대개 고분군의 중심을 이룬 구릉 능선부를 따라 북쪽에서 남쪽으로 일정 간격을 이격하며 축조된 것이 특징이다. 가장 북쪽의 1군집[25호묘~67호묘 군집]의 29호묘, 3군집[5~22호묘]의 13호묘, 4군집[1호묘~4호묘]의 1호묘 및 3호묘 등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렇듯, 29호묘, 1호묘, 3호묘, 13호묘 등은 동일 시기에 다른 고분에 비해 월등하게 대형이고, 출토 유물 또한 탁월하여 왕릉으로 추정되어 왔다.
이외에, 앞에서 언급한 1군집과 3군집 사이의 고분[23, 24, 68~75, 85~91, 92~95호] 중에 1개의 소군집[2군집: 72, 85~91호]이 주목된다. 2군집의 중심고분으로 파악되는 88호묘,91호묘는 상대적으로 대형이며 출토 유물 또한 탁월하다. 그리고, 대성동 능선의 남쪽 하위 5군집[73~83호묘]에서 73호묘를 왕릉급으로 보는 견해가 있지만, 73호묘는 수혈식 석곽묘[구덩식 돌덧널무덤]로서 금관가야 전성기를 지나 쇠퇴기의 고분으로 파악된다.
상기한 금관가야 왕릉을 정리해보면, 대개 29호묘-13호묘-91호묘-88호묘-3호묘-1호묘-73호묘의 순으로 축조된 것으로 파악된다. 가장 먼저 축조된 29호묘는 3세기후엽으로 추정되고, 금관가야가 고구려 광개토왕의 남정(南征)에 의해 쇠퇴한 것을 고려하면 1호묘의 연대를 4세기말 혹은 5세기초로 추정할 수 있다. 따라서 금관가야의 왕릉급 [초]대형 목곽묘(木槨墓)는 3세기 후엽에서 4세기대가 중심 시기이다. 왕릉급 고분 가운데 가장 이른 단계의 29호묘를 제외하면 91호와 88호묘가 단곽식(單槨式)으로 축조된 것이고, 나머지 무덤들은 이혈 주부곽식(異穴主副槨式)인 김해식 목곽묘의 전형에 속한다. 따라서 금관가야 전성기의 왕묘는 이혈주부곽식(異穴主副槨式)의 김해식 목곽묘로 조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김해 대성동 고분군에서 왕릉급인 단곽식(單槨式)의 목곽묘 및 주부곽식(主副槨式) 목곽묘 중에 주곽의 묘 형태는 회(回)자형이라고 볼 수 있다. 즉, 주곽(主槨)이나 단곽식(單槨式)의 대형 목곽묘의 경우, 폭이 넓은 목곽의 장점을 살려 중앙부에 주인공을 안치하고 그 주변을 돌아가면서 유물과 순장자(殉葬者)를 배치한 특징이 보인다. 순장자는 대개 발치쪽에 더 많이 배치되지만 전체 구조는 회(回)자형에 가깝다. 이 회자형 공간의 내부 중앙을 구분하여 사방에 칸막이를 설치하기도 하여 그 외곽 부분이 회랑과 같은 기능을 한 경우도 88호묘의 사례로 보면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왕릉급 목곽묘로 보면, 금관가야는 3세기 후반부터 4세기대에 이르기까지 가야, 신라권의 여러 세력 중에 가장 강력한 세력이었으나 400년 고구려 남정(南征) 이후로 쇠약해지면서 5세기 이후에 다른 여타 가야와 같은 대형 고총의 왕릉을 축조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5세기 전반 이후 김해 대성동 고분군 축조 집단의 쇠퇴 시기와 연동되어 후기 가야의 맹주인 대가야의 고령 지산동 고분군에서 73호분을 시작으로 탁월한 지배층의 고총(高塚)이 축조되기 시작한다. 특히, 대성동 1호묘에서 확인된 발형 기대(鉢形 器臺) 및 장경호[목긴 항아리]의 토기 형태가 대가야에 전해진 것으로 파악되어 두 세력간에 모종의 긴밀한 관계를 상정할 수 있을 것이다.
[김해 대성동 고분군의 역사적 가치]
가야의 여러 고분군 가운데 시기적으로 가장 빨리 조영된 것이 김해 대성동 고분군이다. 하지만 고분의 외양적 규모로 보면, 김해 대성동 고분군은 대가야의 고령 지산동 고분군이나 아라가야의 함안 말이산 고분군에 비할 바가 못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해 대성동 고분군의 중요성은 출토 유물의 탁월한 가치 때문일 것이다. 전기 가야의 맹주로 자리매김한 금관가야 성장의 배경은 철생산과 교역의 중심지라는 점에 기인할 것이다. 금관가야의 성장 배경인 고 김해만(古 金海灣)은 고대 사회에 낙동강을 끼고 있어 대외 교역의 거점 항구로서 지금의 부산과 같은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김해 지역은 기원전 1세기부터 이미 철기 생산이 이루어지면서 철을 매개로 중국, 낙랑군, 일본, 한반도의 여타 정치체들과 다양한 네트워크를 형성하였을 것이다. 김해 세력을 중심으로 한 변한(弁韓) 권역은 낙랑군을 통해 중국의 선진문물을 수입하고 그 반대 급부로 철과 각종 특산물을 공급하였을 것이다. 이 무렵에 중국으로부터 입수된 것은 권력이나 신분을 상징하는 위세품(威勢品)들인데, 장신구, 청동 거울, 유리구슬, 화폐 등이다.
김해 대성동 고분군의 전성기인 3세기 후반~4세기 대에는 기존의 교역 대상 외에 일본 긴키[近畿] 지역이나 중국 북방 지역으로 확대된다. 3세기 후반에는 청동솥[동복]을 비롯한 여러 물품과 함께 훼손된 무기를 부장하는 훼기(毁棄)나 순장(殉葬) 등 새로운 문물이나 풍습이 전래되었다. 이를 부여족의 남하로 보는 학설도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교류, 교역의 산물로 파악한다. 313년 낙랑군 멸망으로 인하여 김해 지역의 대외 교류 양상의 변화가 감지되는데, 기존에는 한군현(漢郡縣)과의 교섭 단절로 주 교역 대상이 왜[일본]로 변화한 것으로 인식하였다. 하지만, 최근 김해 대성동 고분군의 발굴 조사 결과, 중국 동북 지방의 삼연(三燕)계 유물이 다수 출토되는 것을 보면 중국 동북지방과 지속적인 교류를 진행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김해 대성동 고분군 출토 투구나 마구류(馬具類) 등은 고구려보다는 중국 북방과 관련지어야 할 것이다.
한편, 일본과의 교역도 주목해야 한다. 4세기대 무덤에 부장된 후한(後漢) 시대의 청동 거울도 일본을 통하여 전세(傳世)된 것이 유입된 것으로 파악된다. 금관가야에서 일본으로 가는 교역품들이 주로 철기나 토기인데 비해, 금관가야로 들어오는 물품은 일본에서 주로 권위를 상징하는 통형 동기(筒形 銅器), 파형 동기(巴形 銅器), 옥제품(玉製品) 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