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시대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400302
한자 高麗 時代
영어공식명칭 Goryeo Period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남도 김해시
시대 고려/고려 전기
집필자 김광철

[정의]

918년부터 1392년까지 고려가 존속했던 시기의 경상남도 김해 지역의 역사.

[개설]

신라 경덕왕 때 김해소경이었다가 신라 말 김해부(金海府)가 되었다. 고려 건국 후 잠시 임해현(臨海縣)으로 강등되었다가 곧 임해군으로 승격된 후, 다시 김해부가 되었다. 995년(성종 14) 10도제 하에서 금주안동도호부(金州安東都護府)로 고쳤다가 1012년(현종 3)에 금주(金州)가 되었으며, 현종 9년 전국적 군현 개편 때에 5개의 속읍을 가진 주읍으로 성장하였다. 1270년(원종 11)에 김녕도호부(金寧都護府)로 승격되었으나, 1293년(충렬왕 19)에 현(縣)으로 강등되었다가, 1308년에 승격하여 금주목(金州牧)이 되었다. 1310년(충선왕 2)에 여러 목(牧)을 없애면서, 다시 김해부가 되어 고려 말까지 지속되었다.

[금주(金州)의 성립과 권역]

후삼국을 통합한 후 고려는 940년(태조 23) 군현 개편을 단행하면서 김해 지역을 임해현(臨海縣)으로 개편하고 조금 있다가 임해군으로 개칭하였다. 신라통일기에 김해소경이었고, 신라 말 호족 지배 하에서도 김해부로서 위상을 유지했던 것을 감안하면, 임해현으로 개편한 것은 그 읍격을 강등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 그 까닭은 후삼국 시기 김해 지역이 후백제 관할 하에 들어가 있었기 때문에 통일 후 고려 정부가 지역 통제 방식의 하나로 취한 조치였다.

임해현, 임해군으로 강등되었던 김해 지역은 971년(광종 22)에 다시 김해부로 개편됨으로써 고을의 위상을 회복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고려 정부는 김해가 신라 통일기에 ‘소경’이었고, 신라 말 유력 호족이 있었던 지역임을 감안하여 지역 통합 차원에서 다시 읍격을 회복시킨 것이었다. 995년(성종 14) 10도제 체제로 지방 제도를 개편하면서 김해 지역은 금주안동도호부(金州安東都護府)가 되어 그 위상을 그대로 유지하였다.

1018년(현종 9) 김해 지역 사회는 경상도 동남 연해 지역의 거점 도시로 우뚝 서게 되었다. 이 해에 고려 중앙 정부는 전국적으로 지방 제도의 개편을 단행하면서 이미 현종 3년에 금주(金州)로 승격된 바 있는 김해 지역에 그 속읍(屬邑)으로서 5개 고을을 편입시켰다. 이 때 금주의 속읍이 된 고을은 함안군, 의안군, 웅신현, 칠원현, 합포현 등 5개 군현이었다. 이제 김해 지역사회는 서쪽으로 오늘날 창원시와 함안군까지 관할하는 광역형 거점 도시로 성장하게 되었다.

[김해 지역사회의 행정]

고려 시대 지방 제도로서 군현 체제는 크게 일반 군현 영역과 특수 행정 구역인 부곡 영역으로 구성되었고, 군현 영역은 다시 주읍(主邑)과 속읍으로 편제되었다. 주읍이었던 김해 지역에도 일반 군현 영역과 함께 부곡 영역으로서 4곳의 향과 3곳의 부곡이 있었다. 제을미향(齊乙彌鄕), 성화례향(省火禮鄕), 달음포향(達音浦鄕), 감물야향(甘勿也鄕), 수다부곡(水多部曲), 태산부곡(太山部曲), 천읍부곡(川邑部曲) 등이 이 곳들이다. 소(所)는 전하지 않고 있지만, 감물야향이 야철과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아 소일 가능성이 있다.

고려 시대 김해에는 지방관으로 수령인 방어사, 방어부사와 함께, 판관(判官), 사록(司錄), 장서기(掌書記) 등이 파견되어 있었다. 판관과 사록, 장서기는 이른바 속관(屬官)으로서 수령을 보좌하는 한편 행정 업무를 담당하였다. 그 아래에 지방관을 도와 행정 실무를 처리하는 향리층이 있었다. 금주의 향리는 김(金)·허(許)·배(裵)·손(孫)·송(宋)·유(庾)씨 등 토성층이었다. 금주의 향리 액수가 얼마였는지 알 수 없지만, 인구 수를 300정 이상으로 추정하면 51명 정도의 향리가 활동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김해의 지방관과 향리층은 이 곳 치소(治所)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치소에는 치소성[읍성]이 축조되었고, 행정관청인 관아, 객사가 기본적으로 배치되었으며, 향리의 자치 조직인 읍사(邑司)가 자리잡고 있었다. 치소는 인구가 집중되어 있는 곳이었고 도로와 교통의 중심지이기도 하였다.

고려 시대 김해 지역 사회에는 여러 방면의 역로망이 구축되어 있었다. 고려 시대 역로는 22개의 역도(驛道)에 525개의 개별 역이 분포되어 있었는데, 김해 지역에 해당하는 금주도(金州道)에는 31개 역이 소속되어 있었다. 금주도는 김해를 중심으로 칠원, 의안, 함안, 합포, 밀성, 창녕, 청도, 현풍, 계성, 동래, 영산, 울주, 양산, 언양 지역의 역들로 연결되어 있었다. 역도 별 평균 24개 역이 소속되어 있었던 것을 감안하면 김해는 훨씬 많은 역을 관장했던 셈이다. 김해 지역에 설치된 역만 하여도 덕산(德山)[대동면 덕산리성잉(省仍)[진례면 산본리적항(赤項)[장유면 관동리]·금곡(金谷)[한림면 금곡리대역(大驛) 등 5개 역이 설치되어 있었다. 고려 시대 김해는 내륙과 연해 지역으로 연결되는 교통의 출발지이자 중심지였다.

[고려 후기 김해 지역 사회의 변동]

12세기 말 이후 고려는 지역에 따라 농민항쟁, 30년 가까이 계속된 고려-몽골 전쟁, 그리고 외세에 저항한 삼별초 항쟁, 여몽연합군의 일본 정벌, 왜구의 침입 등 내외적 충격을 경험하였다. 이같은 내외적 충격은 지역 사회 변화의 동인으로 작용하면서, 군현의 위상에도 영향을 미쳐 지역 사회의 변화를 가져왔다.

김해 지역에서는 1200년(신종 3) 8월, 일반 주민이 토호 세력 향리를 공격하는 이른바 ‘잡족인의 봉기’가 발생하여 지역사회에 충격을 주었다. 고려-몽골 전쟁에 이어 벌어지는 삼별초 항쟁에서 김해 지역도 삼별초 공격의 대상 지역이 되었다. 1271(원종 12) 4월에 삼별초는 김해를 공격하여 불사르고 노략질하는 등 김해를 초토화시켰다. 그 기세가 얼마나 세었는지 방호장군 박보(朴保)와 별초군은 겁먹고 달아나 산성으로 몸을 숨길 정도였다.

삼별초 항쟁이 진압되고 원의 내정 간섭이 본격화되면서 김해 지역사회는 여몽연합군의 일본 정벌을 위한 전진 기지가 됨으로써 정벌군의 동원과 전함의 건조, 군량 확보 등의 부담을 가장 많이 질 수밖에 없었다. 두 차례에 걸친 일본 원정은 실패로 끝났지만, 가혹한 조세와 역역 수취, 토지의 황폐화로 말미암아 유망민을 대거 발생시켜 지역 사회를 공동화 시키고 말았다.

고려 후기 왜구의 침입은 다시 한번 김해 지역 사회에 충격을 안겨 주었다. 김해 지역에 대한 왜구 침입은 13회 정도로, 경상도 연해 지역에서는 고성 지역과 함께 가장 많은 침입을 당한 곳이다. 1375년(우왕 1) 11월의 왜구 침입에서는 김해 지역 행정 중심인 관아와 성문이 모두 불타는 피해를 입었다. 왜구 침탈은 인명 살상, 촌락 파괴, 관청 방화, 농토의 황폐화, 인구이동 등을 불러와 지역 사회의 변동을 초래케 하는 요인이 되었다.

한편, 거점 도시 금주에 편입되었던 속읍 가운데 일부가 12세기 말부터 하나씩 빠져나가기 시작하였다. 1172년(명종 2)에 김해의 속읍인 함안군과 의안군, 합포현에도 감무가 파견됨으로써 완전히 분리된 것은 아니지만 이들 세 고을이 먼저 금주의 관할에서 떨어져 나갔다. 1282년(충렬왕 8)에는 의안군과 합포현의 고을 이름을 각각 의창현(義昌縣)과 회원현(會原縣)으로 고치고 현령을 파견함으로써 금주로부터 완전히 독립하였고, 함안군도 1373년(공민왕 22)에 지방관으로 지군사(知郡事)가 파견되어 독립하였다. 칠원현은 고려 후기까지 김해에 편입되어 있다가 조선 건국 직전인 1390년(공양왕 2)에 감무가 파견되어 김해로부터 분리되었다. 이렇게 하여 금주의 5개 속읍 중 웅신현 한 곳만 조선 전기까지 김해의 속읍으로 남아있게 되었다.

김해 지역 속읍들이 분리 독립되는 가운데 김해의 읍격에도 변화가 있었다. 1271년(원종 12) 1월 밀양에서 일어난 삼별초 호응 봉기를 금주방어사 김훤(金晅)이 평정한 공으로 김해를 김녕도호부(金寧都護府)로 승격하였다. 1293년(충렬왕 19)에는 안렴사 유호(劉顥)가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하자 김녕현으로 강등시켰다가 1308년(충렬왕 34)에 금주목(金州牧)으로 승격시켰고, 1310년(충선왕 2)에 김해부로 고쳐 고려 후기까지 읍격이 유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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