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4005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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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海 龜山洞 支石墓 |
이칭/별칭 | 김해 구산동 고인돌,구산동 고인돌,구산동 지석묘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고분 |
지역 | 경상남도 김해시 구산동 1079 |
시대 | 선사/청동기 |
집필자 | 소배경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2006년~2008년 1월 - 김해 구산동 지석묘 삼강문화재연구원에서 시굴·발굴 조사 실시[2006~20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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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지정 일시 | 2012년 7월 19일 - 김해 구산동 지석묘 경상남도 기념물 제280호 지정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2021년 11월 19일 - 김해 구산동 지석묘 문화재청고시 제2021-141호에 따라 문화재 지정 번호 삭제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2021년 - 김해 구산동 지석묘 삼강문화재연구원에서 시굴·발굴 조사 실시[2021]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2023년 - 김해 구산동 지석묘 삼강문화재연구원에서 수습 발굴 조사 실시 |
소재지 | 김해 구산동 지석묘 - 경상남도 김해시 구산동 1079 |
출토 유물 소장처 | 국립김해박물관 - 경상남도 김해시 가야의길 190[구산동 232] |
성격 | 고인돌 |
양식 | 널무덤 |
크기(높이,지름) | 10m[덮개돌 길이]|4.5m[덮개돌 너비] |
소유자 | 김해시 |
관리자 | 김해시 |
문화재 지정 번호 | 경상남도 기념물 |
[정의]
경상남도 김해시 구산동에 있는 국내 최대 규모의 청동기 시대 고인돌.
[위치]
김해 구산동 지석묘(金海 龜山洞 支石墓)는 김해시 구산동 1079번지에 있다.
[발굴 조사 경위 및 결과]
2006년~2008년 1월 경남개발공사의 의뢰를 받아 삼강문화재연구원이 김해 구산 지구 도시 개발 사업 부지에 포함되는 유적들에 대한 시굴·발굴 조사를 진행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확인된 A2-1호 고인돌이 바로 김해 구산동 지석묘이다. 이후 2021년도에 김해시는 김해 구산동 지석묘 정비 사업과 사적 지정 사업을 진행하고자 하였다. 이에 당시 시굴·발굴 조사 기관이었던 삼강문화재연구원에 김해 구산동 지석묘 매장 주체 시설 여부에 대한 시굴·발굴 조사를 의뢰하였다. 그 결과 초대형 덮개돌[상석] 아래에서 널무덤[목관묘] 1기가 확인되었다. 2021년~2022년 김해시가 김해 구산동 지석묘 정비 사업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고인돌 덮개돌 아래 깐돌[부석(敷石)]을 훼손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이에 2023년 복원 정비 과정에서 훼손된 박석 아래 송국리(松菊里) 문화층에 대한 수습 발굴 조사를 통해 주거지 1동과 소성 유구, 수혈 등을 확인하였다.
[형태]
덮개돌의 규모는 길이가 10m, 너비가 4.5m이고, 무게는 350톤~400톤으로 추산된다. 남북 방향으로 현존 길이 85m, 너비 19m 되는 세장방형의 기단석렬(基壇石列)과 그 사이에 깐돌을 깔았다. 덮개돌은 동쪽 상부가 단면 ‘L’ 자형으로 깨져 있다. 배수관 부설 공사 때 파괴된 것으로 보인다. 훼손 부분은 어림잡아 덮개돌의 1/10 정도의 크기로 보이기 때문에 보다 거대하였던 덮개돌로 추정해야 한다. 발굴 당시 기단묘(基壇墓)의 규모로 정의하였던 깐돌의 분포는 서쪽 끝과 동쪽 끝의 양쪽 기단석렬 라인이 확인되었지만, 남쪽 끝과 북쪽 끝은 확인할 수 없었다. 북쪽도 마찬가지이지만 남쪽의 깐돌은 금관대로 아래까지 뻗어 나갔을 것으로 추정된다.
[출토 유물]
2021년도 발굴 조사 당시 덮개돌 아래 널무덤 내부에서 옹 1점과 대부발(臺附鉢) 1점이 완형으로 출토되었다.
[현황]
김해 구산동 지석묘는 2012년 7월 19일 경상남도 기념물 제280호로 지정되었다. 소유자 및 관리자는 김해시이다.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고시 제2021-141호 「문화재 지정[등록]번호 삭제 및 문화재명 표기 방식 변경 고시」에 따라 문화재 지정 번호는 삭제되었다. 현재 김해 구산동 지석묘는 복원 정비 진행 중에 있으며, 출토 유물은 국립김해박물관에서 소장하여 관리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김해 구산동 지석묘의 매장 주체부인 널무덤이 확인되었다. 널무덤에서는 무덤의 축조 시기를 판단할 수 있는 유물이 출토되어 청동기 시대 삼각 점토대 단계까지 하한 연대가 내려간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또한 국내 최대 규모라는 상징성과 함께 가장 늦은 단계의 고인돌이자, 배후 취락의 촌장과 구성원들이 사용한 연접 기단묘로 볼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