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40056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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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海 餘來里 遺蹟 |
영어공식명칭 | Relics of Yeorae-ri, Gimhae |
이칭/별칭 | 김해 진영 지구 국민 임대 주택 건설 사업 지구 내 유적,여래리 유적,여래리 복합 유적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유적(일반) |
지역 | 경상남도 김해시 진영읍 여래리 506 |
시대 | 선사/청동기,고대/삼국 시대,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양화영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2006년 9월 11일~2006년 9월 25일 - 김해 여래리 유적 우리문화재연구원에서 지표 조사 실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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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 조사 시기/일시 | 2006년 11월 30일~2007년 1월 28일 - 김해 여래리 유적 우리문화재연구원에서 시굴 조사 실시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2007년 2월 5일~2007년 11월 21일 - 김해 여래리 유적 우리문화재연구원에서 구제 발굴 조사 실시 |
현 소재지 | 김해 여래리 유적 - 경상남도 김해시 진영읍 여래리 506 |
성격 | 복합 유적 |
크기(높이,길이,둘레) | 510㎝[청동기 시대 집자리 길이]|440㎝[청동기 시대 집자리 너비]|15㎝[청동기 시대 집자리 깊이]|110㎝~257㎝[청동기 시대 인공 구덩이 길이]|36㎝~150㎝[청동기 시대 인공 구덩이 너비]|11㎝~36㎝[청동기 시대 인공 구덩이 깊이]|220㎝~590㎝[삼국 시대 지상 건물터 장축]|136㎝~580㎝[삼국 시대 지상 건물터 단축]|590㎝[삼국 시대 팔각형 고상 건물터 장축]|540㎝[삼국 시대 팔각형 고상 건물터 단축]|80㎝~602㎝[삼국 시대 인공 구덩이 길이]|10㎝~35㎝[삼국 시대 인공 구덩이 깊이]|114㎝~260㎝[조선 시대 무덤 길이]|45㎝~125㎝[조선 시대 무덤 너비]|20㎝~80㎝[조선 시대 무덤 깊이] |
면적 | 15,400㎡ |
[정의]
경상남도 김해시 진영읍 여래리에 있는 청동기 시대·삼국 시대 및 조선 시대의 복합 유적.
[개설]
김해 여래리 유적(金海 餘來里 遺蹟)은 청동기 시대 및 삼국 시대의 취락과 조선 시대의 논과 무덤 떼가 있는 복합 유적으로, 우리문화재연구원에서 조사하였다. 2006년 9월 11일~동년 9월 25일 지표 조사를 실시한 후, 같은 해 11월 30일~2007년 1월 28일에 시굴 조사를 하였고, 그해 2월 5일~동년 11월 21일 구제 발굴 조사를 실시하였다. 국민 임대 주택 조성 부지에 해당하는 자리로, 조사를 통해 청동기 시대의 집자리[주거지], 인공 구덩이[수혈], 도랑[구]과 삼국 시대의 지상 건물터, 인공 구덩이, 도랑, 기둥 구멍[주혈], 숯가마[탄요], 도로 유구, 그리고 조선 시대의 논과 무덤 등을 확인하였다.
[위치]
김해 여래리 유적은 김해시 진영읍 여래리 506번지에 있다. 선상지상 충적 대지 및 구릉 비탈 일부에 위치한다. 남쪽으로는 동-서향으로 경전선 철로가 지나가고, 북쪽으로는 신설된 국도 제14호선이 동-서로 이어진다. 유적은 낙동강(洛東江) 하류의 남쪽에 발달한 대산평야의 남단에 자리하는데, 대산평야는 낙동강 북쪽에 있는 하남평야와 함께 하나의 분저지를 형성하고 있다. 이 분저지 일부와 주변부에는 낮은 구릉 지대가 부분적으로 분포하며, 바깥으로는 해발 200-300m급의 구릉지와 산지가 전개되어 하나의 분지가 형성되어 있다.
[형태]
면적은 1만 5400㎡이다. 청동기 시대의 집자리 1동, 인공 구덩이 6기, 도랑 1기와 삼국 시대의 지상 건물터 27기, 인공 구덩이 147기, 소형 인공 구덩이 15기, 도랑 7기, 기둥 구멍 214개, 도로 70m, 숯가마 1기, 하도 1기, 독무덤 1기, 그리고 조선 시대의 경작층 1개 층과 무덤 42기를 확인하였다. 청동기 시대 집자리의 장축 방향은 등고선과 평행하며, 평면 형태는 타원형이다. 규모는 길이가 510㎝, 너비가 440㎝, 깊이가 15㎝이다. 내부 시설로 화덕 시설과 타원형의 저장 시설, 기둥 구멍이 있는 송국리형 집자리로, 두 차례에 걸쳐 사용되었다. 유물은 민무늬 토기[무문 토기] 조각과 숯돌[지석], 갈판[연석], 미완성 석기가 출토되었다. 인공 구덩이는 평면 형태가 방형계인데, 평면에서 6기가 중복된 양상이다. 규모는 길이 110㎝~257㎝, 너비 36㎝~150㎝, 깊이 11㎝~36㎝이며, 유물은 민무늬 토기 조각이 소량 출토되었다. 이외에도 평면 형태가 ‘一’ 자형인 도랑을 확인하였다. 청동기 시대 유구의 조영 시기는 송국리 문화 단계에 해당한다.
삼국 시대의 지상 건물터는 27기를 확인하였는데, 26기의 평면 형태는 방형과 장방형이며, 1기[7호]는 평면이 팔각형이다. 규모는 장축이 220㎝~590㎝, 단축이 136㎝~580㎝이며, 구조는 2칸×2칸이 8기로 가장 많고, 1칸×1칸, 1칸×2칸, 2칸×1칸, 3칸×2칸, 4칸×2칸, 5칸×4칸 등 다양하다. 일부 기둥 구멍에서 목주(木主) 흔적과 보조 기둥 구멍이 보이며, 유물은 내부에서 뚜껑 조각과 연질제 아가리[구연부] 조각, 시루 조각, 굽다리 접시 조각, 손잡이 조각 등이 출토되었다. 팔각형 고상 건물터의 규모는 장축 590㎝, 단축 540㎝이며, 구조는 외진주(外陳主)가 팔각형, 내진주(內陳主)가 방형이다. 내진주의 구조는 1칸×1칸이며, 기둥 구멍은 외진주가 13개, 내진주가 4개 확인되었다. 기둥 구멍에서 대부분 목주 흔적을 확인하였는데, 제사용의 건물로 추정된다. 지상 건물터는 팔각 건물터를 중심으로 타원형의 배치 양상을 보인다.
인공 구덩이는 평면 형태가 원형계와 방형계, 부정형인 147기를 확인하였으며, 규모는 길이 80㎝~602㎝, 깊이 10㎝~35㎝로 다양하다. 조성은 단독 혹은 2기~20여 기가 중복된 양상이다. 인공 구덩이의 중복된 양상은 입지적 여건과 인위적 의도에 따라 지속적이고 비교적 단시간에 조성되었다. 3기에서만 내부 시설이 확인되었는데, 22호에는 방형 형태의 소성부(燒成部)가, 44호에는 석축 시설이, 146호에는 부뚜막과 화덕 자리, 소형의 내부 인공 구덩이가 설치되었다. 유물은 항아리와 굽다리 접시 조각, 손잡이 조각, 기대 대각 조각, 뚜껑 조각, 시루 조각, 지석, 송풍관, 철광석, 슬래그, 단조박 조각 등이 출토되었다. 인공 구덩이는 제철 생산 공방지, 의례용의 기능과 원기능이 완전히 상실된 시점 이후에는 폐기장으로 전용된 기능을 하였다. 또 하도의 서쪽에서 삼국 시대 유구 중 가장 후행하는 도랑 7기를 확인하였다. 평면 형태는 ‘一’ 자형, ‘Y’ 자형이 확인되는데, ‘Y’ 자형은 인위적으로 구획하기 위한 시설로 추정된다. 또 특별한 정형성 없이 군집 양상으로 배치된 기둥 구멍 214개도 확인하였다. 기둥 구멍은 성격이 다른 유구와 중복이 심하며, 다양한 크기와 깊이 때문에 정확한 양상을 파악하기는 어렵다.
숯가마는 평면 형태가 장타원형이며, 주축 방향은 등고선과 평행한다. 연도부와 측면 작업장, 소성부를 갖춘 형태이며, 측구 2개가 잔존한다. 소성부의 규모는 길이 507㎝, 너비 96㎝로, 소결된 흔적과 벽체가 일부 남아 있다. 연도부의 규모는 길이 140㎝, 너비 118㎝, 깊이 18㎝이며, 평면 형태는 원형에 가까운데, 바닥은 소결화되지 않고 목탄과 소토가 확인되었다. 유물로는 연질 토기 조각이 출토되었다.
또 평면 배치상으로 삼국 시대 유적군 외곽으로 이어지는 도로 유구를 확인하였는데, 규모는 길이가 70m, 폭이 5m~6m이다. 천석을 깔아 침하를 방지하는 방식으로 조성하였는데, 바닥에서 바퀴흔으로 추정되는 홈을 확인하였다. 도로의 전역 바닥에는 굽다리 접시 조각, 토제품, 구연부 조각, 저부 조각 등과 함께 철강석, 슬래그도 존재하였다. 하도는 삼국 시대 유구 중 가장 선행하는 것으로 지상 건물터와 인공 구덩이, 도랑, 기둥 구멍과의 중복이 심하며, 북쪽으로 갈수록 깊이가 낮아지면서 중간중간이 결실된 것으로 판단되었다. 하도는 상시 하천이 아니라 비가 내릴 때 물이 흘렀던 우곡(雨谷)의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또 인공 구덩이 9호를 파괴하고 조영된 단옹식 독무덤 1기도 확인하였다. 삼국 시대 취락의 중심 연대는 5세기 중반~6세기 대이다.
조선 시대의 논층은 샘플 조사를 통해 바닥면과 계단상 논둑을 확인하였다. 논층에서는 삼국 시대의 굽다리 접시 조각과 통일신라 시대의 토기 조각, 그리고 조선 시대의 분청자기 조각 등 다양한 시기의 유물을 확인하였는데, 논층은 조선 전기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또 움무덤 17기와 널무덤 25기를 확인하였는데, 등고선과 직교한다. 평면 형태는 장방형이 대부분이며, 단독으로 위치하였다. 규모는 길이 114㎝~260㎝, 너비 45㎝~125㎝, 깊이 20㎝~80㎝이며, 널의 규모는 길이가 130㎝~215㎝, 너비가 41㎝~80㎝이다. 널무덤에서만 벽감[감실]이 확인되었으며, 28호 널무덤에는 벽감과 요갱(腰坑)이 설치되었다. 유물은 분청사기와 백자, 청동제 그릇[완], 청동 숟가락, 철제 가위, 구슬이 출토되었다.
[현황]
김해 여래리 유적에 대한 발굴 조사 완료 후, 삼국 시대의 도로 유구는 학술 자문회의 회의 결과에 따라 지하에 원형 보존하였다. 현재 진영휴먼시아아파트가 조성되어 있고, 유적의 존재를 알려 주는 국가유산 알림판이 설치되어 있다.
[의의와 평가]
김해 여래리 유적은 제철을 중심으로 한 삼국 시대 복합적인 생산 유적으로서의 특수 취락의 가능성을 보여 준다는 점과, 당시 철 생산 취락의 표준적인 모델이었을 가능성을 보여 준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특히 제철 관련 출토 유물을 통해서 밝혀진 바, 공정 과정 중 제련, 제강, 단야의 전 과정이 한 유적 내에서 이루어지는 일원적 생산 체계를 갖추었다는 점이 매우 중요한데, 향후 체계적인 조사와 분석을 통해 삼국 시대 생산 취락의 면모를 밝힐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